시작노트 171

붉다는 건

붉다는 건 김영미 한 계절이 붉은 칩거에 들어간다 새콤 달달한 안부가 겨울 밖으로 멀어지는 사과밭 봄의 첩자가 은신하던 씨앗은 팔월의 태양과 벌들의 노래가 어우러진 꽃의 화석이다 열매가 되지 못한 날들은 꽃의 과오가 아닌 그 폐허를 거치지 않은 벌들의 방심이었다 오늘도 유폐된 꽃의 언저리에 세상의 허기들이 쌓인다 주름 깊은 늙은 길에서 태양이 떨군 심장을 줍는다 무너져가는 이름들 사이 잔망스런 기억의 사과밭을 걸어간다 나무 아래 개미의 길에는 사과꽃이 있었고 개미들 발자국이 꽃으로 피어나던 숨 막힌 행보를 당겨본다 꽃신 벗어놓고 사라진 것들이 궁금해지는데 열매는 꽃에 대한 가장 오래된 상속자라고 누군가 말한다 과육을 베어 문 붉은 가슴에 사과꽃이 핀다 18.10.03 붉음은 풋기 덜어낸 열정과 유혹이다...

시작노트 2018.10.06

그리움이 번지는

그리움이 번지는/ 김영미 하늘이 간밤의 선잠을 털어내던 새벽 햇살 속으로 물안개 몸을 섞는다 나비가 스쳐간 강 언저리 윤슬에 일렁이는 마른 꽃대궁 웅크린 시간 속 세월의 주름들은 강 밖에 있다 바람이 머물다간 그 자리 풀꽃은 씨방을 비우고 한 계절 몸살지다 슬어놓은 생이 숨는다 비춰지는 모든 것은 바깥에 있다 거울 밖 마음처럼 물결에 어리는 그림자가 고독하다 내 생의 가녘에 그대가 있지만 강과 풀꽃처럼 닿을 수 없는 바깥이다 꽃잎이 열매에 이르는 길과 열매가 잎을 틔우는 생의 경계로 번지는 끌림 내가 바깥에서 그대 마음 안을 서성이는 것처럼 심장 졸아드는 날이거나, 무성영화 속 지루한 삶의 자막처럼 흐르지 못하고 혀를 굳힌 마음의 메타포를 던지는 그댈 향한, 18년 시월의 첫날에 모던포엠19년 신년호 착..

시작노트 2018.10.02

가을, 그 달콤한

가을, 그 달콤한 / 김영미 한낮을 가로지르는 풀 내음 햇살 마르는 소리에 단풍과의 미궁에 빠진 나무 꽃들의 파열음으로 꿀이 되던 길에는 허공에 가지 치며 햇빛이 익어간다 여문 생 저장한 노인의 가슴처럼 꽃들의 유언으로 달콤하던 양봉장이 한산해지자 풀섶마다 반쪽을 찾는 날개 짓이 분주하다 허공의 음계를 조율하며 저들 노래에 취한 내 사랑은 잠시 휴업 중 지상의 성장기속으로 잠입한 봄날이 긴 여정의 산고를 견디며 단단해지는 계절 호접몽 여운이 감도는 양봉장엔 꿀 없는 밀납으로 사랑의 음표가 깃든다 노인의 틀니처럼 슬픔을 밀어내며 비상하려는 모든 꿈은 아름답다 꽃과 곤충 사람의 날개가 빛날 수 있는 건 날개보다 올곧은 사랑의 심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2018.9.11 모던포엠19년 신년호, 착각의시학(사화집)

시작노트 2018.09.11

나무야 나무야 뭐했니

나무야 나무야 뭐했니 /김영미 라일락 향낭 터트리는 저 빗소리 베고 한숨 자고 나면 숲은 더욱 울창하겠지 푸르름 덧칠하는 풀들의 그림 뒤로 버짐 먹은 고목은 겨울의 강 차마 건너지 못했나 했는데 긴 잠 떨치고 깨어나 연둣빛 혀 내민다 봄을 예열하던 진열대를 빠져나온 꽃들의 줄서기가 끝날쯤에야 감나무는 방명록에 서명 한다 두텁던 세사의 껍질 속 푸른 심지 돋우며 사랑을 앓다 출처를 알 수 없는 희망의 바람으로 가지마다 꽃들의 박물관을 짓고 있다 그곳에 마음 놓는 사이 사월의 날짜들이 지워지고 있다 향기롭던 그 전율 마른버짐 같은 그리움 번져가는 녹음 속에 풀어 놓고 해묵은 경전 펼치며 빗방울 향해 뿌리를 뻗는다 고사목 향하던 가슴에 꽃눈 부푸는 저 아찔한, 2018.4.26 18.9 모던포엠

시작노트 2018.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