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시인의 참 시詩 방앗간 42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42회] 곶감

곶감/ 김영미 가을이 왔다마르지 않고는 얻어낼 수 없는 바람의 날들허공이 내 안의 문서가 되는 계절이다 감을 벗긴다여름의 순수를 벗기고성장기의 방과 후 시간을 벗긴다 평생 분칠 한번 두둑하지 못한 어머니는내 책상보다 낡아지기 시작했고이 가을에 감들은 울컥한 눈물로 다가온다따듯한 계절을 포기한 어머니까마득하게 사라진 표지를 본다 링거 속의 사연만으로는 밝힐 수 없는지상의 아름다운 고뇌와 바람을 안고태양의 써레질을 견디며 곶감이 되는 동안미라처럼 말라가던 어머니 곶감의 분칠은 가을의 마지막 터치수의를 입고서야 뽀얗게 분칠하고환한 미소 머금고 간 어머니는내 감성을 온기로 어우른다어.머.니~불러만 보아도 내 가슴은말캉말캉 해맑게 따습다 [作詩메모]청도에 사는 지인이 보내 준 감 한 박스가 도착했다. 그 감을 보..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41회] 진눈깨비

진눈깨비/ 김영미 블랙 앤 레드 창 밖재즈 선율로 진눈깨비는 내린다그대의 사랑도 진눈깨비를 닮았었지저녁이 가까울수록 흰 이를 드러내던 표정이며가끔은 엇박자로 바뀌던 그대의 너스레사랑의 골목을 잃고서끝내 하지 못한 고백을 후회하던그 틈바구니에서 진눈깨비 내리던프리지어는 한때노란 향기만으로도 골목을 들썩이었다 조금 전 어깨 위 투박한 고백을 툭툭 털고서야사랑을 얻은 누군가의 대화를 물끄러미 넘겨보던그대는 먼 바다의 진눈깨비처럼 나부낀다 2월은 지난날 카페에서 바라보던블랙 앤 레드 빛 너머 진눈깨비를 기억한다지퍼는 이가 망가진 후부터 추억을 책임진다불안이란 낡은 장롱 속 추억을 책임져야 하는나프탈렌 냄새이기 때문이다 오늘, 세상의 모든 진눈깨비는프리지어를 몰고 오고 있단 말인가기다리지 않아도 2월은 또 올 것..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40회] 길 위에서

길 위에서/ 김영미 가을이 되어은행나무 길을 걷는 것은먼 길 달려온 햇살의 발가락이눈부시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의 일식으로 그 향기땅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며바람의 페이지가 없이도이 길이 끝나기 전 릴케는한 권의 가을을 완성할 것이다 가을이 비워지기 전 서둘러지상의 어지러운 잠을화석으로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여름을 등지고가을로 쫓긴 그해에도증발하고 말 땀의 증거들은오후의 체온을 비집는 공복 속에몇 잎의 가난으로도 빛을 발하던눈부신 사연 씨알을 품은 태양의 길은 이어져걸음을 뗄 때마다 잠행하던내 안의 캔버스는몇 번의 붓칠만으로도아우성치는 실핏줄들이 떨켜에 가닿는다 [시작메모]- 별이 된 선생님을 생각하며곰실거리는 햇살들의 소환장을 받고서 은행나무 길을 걸었습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릴케의 시어들이 잠행하듯 ..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39회] 어부지리

어부지리(漁夫之利)/ 김영미 태풍을 동반한 비가 내릴 것이다. TV에서 말하는 아나운서의 늘씬한 다리 밑으로 ‘여야협상 결렬’이라는 자막이 스쳐간다 오전을 비켜나간 비 예보가 오후가 되어서야 내린다구름이 제각각 다른 몸짓을 주장했기 때문일까오후로 외출하는 우산은 오전의 착각을 장식물처럼 즐긴다때론 골목 끝에 이르러 자신의 둥근 질서를 버리고붉은 벽돌의 또 다른 날들 속으로 걸음을 옮긴다예감은 조금씩 습기를 덜어내며 하루치 변명을 줄여간다 비가 약속을 어겼다는 건노아의 계절이 방주를 짓지 못했다는 것일까빗나간 약속은 우산을 잊고선 말라붙지 못한다맞잡으면 눈물의 곡절도 낭만이 되는 길을 찾아내거나그 뒤편의 질펀한 이별을 치르기 전까지는갈림길 방황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TV는 바다 저쪽의 도요새와 무명조개의 ..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38회] 구름의 책장을 펼치며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38회] 구름의 책장을 펼치며기사승인 2024.11.08  09:28:58- 작게+ 크게공유 구름의 책장을 펼치며/ 김영미 서쪽을 향해 조그만 창을 낸다구름의 책장을 펼치면노을은 가장 낮은 곳에 머무는 경전이 되어노년의 다감한 눈빛에 머문다 태어나던 날의 눈 부신 빛 내림누리를 향해 달려가는 학창 시절의 바람누가 준 적선이 아닌데 잊고 산 시간가야 할 길을 가르쳐 준 이들에게이제야 고마움이 뭉클뭉클 와닿는데   한해 끄트머리 구름의 밀월을 넘겨다보며세상을 향한 부채에 대해 곰곰 살핀다우리가 살아온 내력만큼지상의 따듯한 전설이 책갈피에 쌓이고맞잡은 손과 손이 피돌기 세상을 펼치면노을빛은 더욱더 아름다울 거라고 햇빛과 나무숲 비와 바람 속을 지나오며선조들에서 후손들로 이어온두근거리..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37회] 이택재에서 동사강목을 읽다

이택재에서 동사강목을 읽다/ 김영미 학문의 밭은 넓다아니 묵향의 아집에 가로막힌선비의 길은 비좁다 뻐꾹새 울음이 명리의 담장을 겨우 넘어와한 사나이의 서책 속에서 실학을 찾아낸 건한 시대의 혁명이었을까노비와 손 잡고 나무를 태워 숯을 굽고 자신을 사르던경세치용의 역사는 장터에서 시작되는가 번잡스레 요점 잃은 역사책에서 어긋난 필법의 오류를 바로잡고이십여 년을 역사 정론의 뿌리를 찾아 기록한 열일곱 권의 편년체 한 때 삿갓의 무게에 눌려벼루 밖의 들녘을 바라보는 일이 힘겨울 때가 있었다어짐이 때를 놓치면 탄식이 됨을 곰곰이 되새기며당쟁이 길어질수록 선비의 기개는 남루해 지는그 알 수 없는 누습을 견뎌내는 동안누군가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했고누군가는 또 다른 아픔의 암중모색이라고 했다 한 촌로가 통속 ..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36회]인디언

인디언/ 김영미 한때 나는 주술의 꿈을 찾기 위해낯선 시간 속에서 헤맨 적 있었다어둡던 현실을 외면하는 한낮의 몽유병을 앓거나이름 모를 부족이 되어태양의 나이를 헤아리는 샤먼이 되기도 했다 고산의 희박한 체온을 견디기 위해모닥불을 피우거나낯선 땅의 하늘을 동경하면서한 마리 말도 없이 자동차도 없이맨발로 거친 초원을 헤맸다 쉽사리 사위지 않는 모닥불 속에서밤하늘 저쪽 별들의 예언을 살피는 일긴 장마가 찾아올 때마다죽음은 순서 없이 불타 사라진 별을 찾아더 멀리 떠나갔지만아무도 그 행방을 염려하거나 얘기하지 않는다 돌을 길어 올려 제국을 만들고도몇 줌의 침탈에 멸망하였지만바람 소리 들어보라 대답해 줄 것이니별들을 보아라 답을 얻을 것이니오랜 세월 길을 찾는 유일한 방식을 안다몇 모금의 주술을 피워 올리거나모..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35회] 수맥 탐지자

수맥 탐지자/ 김영미 컴퓨터의 블랙홀에 홀릭되는그의 가슴에서 모래바람이 인다콘크리트빌딩 숲에 갇힌 낙타는월급봉투의 숫자에 갇힌 비좁은 틈새로가물거리는 오아시스를 찾는다 어떠한 비도그의 목젖을 적셔주지 못했으나어느 날의 수행자는그의 갈증을 노마드의 시작이라고 명명해주곤 했다 비가 되지 않는 구름의 소문 저쪽땅이 갈라지고새들의 행방이 길을 바꾸는 곳태양을 달군 길에서 쓰러지곤 하는 모랫길을그는 걸어왔다 그의 손가락으로 타전하는 신호들이더 이상 길을 찾지 못한 어느 날 오후비로소 땅속 습기를 찾던 나무의 이파리가그의 손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사람들의 건조한 눈빛에서 생기가 돌았다 나무를 세워 쿵쿵 땅속의 안부를 살피는그의 눈에도 물기가 돌았다 [시작메모]- 진정성 있는 시의 길이란- 현직에 몸담고 있는 ..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34회]코비드 연인

코비드 연인/ 김영미 횡단보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쿨룩쿨룩 기침을 한다마스크 속 눈빛 표정들이 낯설고나도 멈칫거린다 소문들은 양지를 찾아가지만꽃소식은 한걸음 물러나고한낮의 가로수들은 춥다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데웅크린 사람들과 사람 사이는 아득한 터널이다 지상의 역병으로 미래가 보이지 않는 동안에도꽃 멀미는 쿨렁쿨렁 몰려온다자릿길 벗어난 버스가비틀대며 하냥 빛을 실어 나르지만묵언 수행 중인 봄은 어디로 쓰러질지 모른다 버스에 앉은 마스크가바이러스의 누명을 쓰고 꽃잎을 나풀대지만나비의 길은 고단하다꿀을 쫓던 벌떼들 종적도 묘연하다터널 안으로 빛이 몰려온다한 걸음또한 걸음마음은 이미 네게 닿았다 [시작메모]- 그 해 봄을 기억하며- 한동안 코로나로 인해 불신이라는 괴질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한동..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32회] 그늘의 시간을 보다

그늘의 시간을 보다 / 김영미 칠사산 속을 산책하다가문득 눈에 띈 버섯무리현란함으로 보아 독버섯임에 분명하다노란빛 혹은 형형 색채 속에서독성의 날들을 보낸다는 것썩거나 죽은 나무의 그늘을 섭취하며햇살의 반대편을 느린 생애로 버텼으리라 내 안의 사랑도 그랬을 것이다넝쿨처럼 뻗어와 칭칭이 마음을 흔들어백지와 먹물이 뒤섞인 젊음의 뒤안길에서나의 사랑도이지러진 상처들을 보호하기 위해독성의 은신처를 빌려야 했으리라 사랑은 독이다아니, 내 안의 느린 시간을 보호하기 위한썩은 양분들이다습기 찬 계절 속을 서성인다는 건얼마나 찬란한 발효의 독성이던가나는 그늘들의 시간을 지우고서밤의 입구이슬들이 몰려오는 또 다른 감촉들에게귀를 적시기 시작한다 [시작메모]- 여름 속의 가을을 지나며 -우리네 삶도 숲의 나무처럼 넝쿨을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