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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티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

산벚나무를 묻지마라/ 임경림

임경림 시인 / 산벚나무를 묻지마라 ​ 늙은 산벚나무가 온 산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가부좌 틀고 앉은 벙어리부처를 먹이고, 벌떼 같은 하늘과 구름을 먹이고, 떼쟁이 햇살과 바람과새를 먹이고, 수시로 엿듣는 여우비를 먹이고, 툇마루에 눌러앉은 한 톨의 과거와 할미보살을 먹이고, 두리번두리번 못 다 익은 열매들의 슬픔을 먹이고, 애벌레의 낮잠 끝에 서성이는 노랑나비를 먹이고, 먹이고…먹이고, 흘러 넘친 단물이 절 밖을 풀어먹이고 있었다 젖무덤 열어젖힌 산벚나무, 무덤 속에 든 어미가 무덤 밖에 서 있다 퉁퉁퉁 불어터진 시간이 아가아가 아가를 숨가쁘게 불러댄다 산벚나무를 묻지 마라 코 닫고 눈 닫고 귀 걸어 잠그고 문둥이 속으로 들어간 절 한 채 어두워지고 있으리라 ​​ 임경림 시인 1961년 경북 고령에서 ..

물 같은 사랑/ 최승규

물 같은 사랑/ 최승규 전생(前生)부터였을까 차안(此岸)에서였을까 그대들의 사랑, 그 시작은 서로 다른 골에서 태어나 각기 다른 내를 지나 천(川)을 흘러 두물머리에서 합수한 물 같은 사랑 더 큰 강(江)을 이루어 청머루 빛보다 더 푸른 꿈을 꾸며 망망대해 가야 하는 그대들의 삶이 물과 같이 빈틈없기를… 늘 함께 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지주(支柱)가 되어 붙잡아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꼭 필요한 존재로 혹, 삶의 여정에서 노도(怒濤)나 폭풍우(暴風雨)를 만나도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의연한 물의 그런 평상심(平常心)으로 변함없이 사랑하기를… 홀로 반짝이던 이슬방울 땅속에 스며들어 하나가 되어 서로서로 정성을 다해 작은 씨앗을 싹틔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해주듯 마주 잡아 하나가 된 그 손 가정(家庭)이..

그리운 약국 / 배정원

그리운 약국 / 배정원 세번째 약국엔 새장이 있었다 햇살은 넉넉하였고 한 쌍의 카나리아는 하얀 진통제를 쪼고 있었다 구리반지보다 더 가느다란 손이 진열장을 열면 아스피린들, 눈처럼 쏟아져 아직 녹지 않은 눈은 눈물겨웠다 병든 과일나무 분재의 웃음이 석유스토브의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던, 겨울 아침 저물 무렵 시장골목이 끝나는 곳에 세번째 약국이 있었고 그곳엔 소복을 걸친 약사와, 정적과, 불치의 病이 있었다 캡술에 든 흰가루를 드링크제의 목을 비틀어 마셔도 해독되지 않는 날들은 식도의 어디쯤에서 분해되는가 유리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면 햇살은 또 그렇게 저희끼리 몰려다니며 깔깔대고 있었다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해묵음에 대하여 / 박경원

해묵음에 대하여 / 박경원 원래의 길이 지워진 녹슨 나사를 풀다가 나는 보았다, 녹이 벗겨지고 잇몸만 남은 수나사에 비해 아직은 생생히 남아 있는 암나사의 해묵은 틈, 이가 주저앉은 자리마다 세월의 꽃이 피어 원래의 청춘을 버리고 그리움의 뒤안길로 견뎌온 우리들의 녹슨 골목길도 함께 보인다. 빠진 못자리처럼 녹슬고 지친 눈빛을 닦으며 돌아오는 길 나무 아래 작은 벌레들의 울음에도 헐거운 발길을 곧추세우는, 평생 샛길 한번 내지 못한 골목과 골목 사이 우리들의 작은 풍경. 문패가 바뀌고 늦은 귀가의 흐느적한 노랫소리 지워졌어도 그쯤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텅 빈 정적을 흔들어 깨우는 습관의 해묵은 자리는 깊은 밤 떠난 사람 아닌 우리들의 몫이다. 밤새 서성이던 골목도 잠들어 이제는 눈 좀 붙여야지, 하며 혼자..

오이도/ 이효숙

오이도 이효숙 1 섬의 뿌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멀미를 겨워하던 이웃들은 하나씩 짐을 구렸다. 비워낸 자궁처럼 더 이상 불빛이 보이지 않는 빈 집의 문들은 어둠 속에서 저 혼자 펄럭이고 허기진 별들은 버려진 그물더미를 갉아 먹으며 궁색한 밤을 비워내고 있었다. 아무와도 약속하지 않았던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새벽의 근처에서 싸늘한 바다를 물어뜯던 까마귀 떼. 죽음 몇 뿌리 헹궈내던 그 바다에서 양식(糧食)처럼 자라나던 굴들의 여린 살과 해초의 푸른 머리칼로 밥상 위를 가늠하던 아, 아 지금은 울부짖다 목이 쉰 침묵의 섬. 바다 위로 우우 몰려가며 가래 끓던 바람 소리도 아주 가버리거나 절벽 아래서 검붉게 피멍든 채로 누워 버렸는지 사방은 허물어진 소문과 플라스틱 문패 속에 버려진 이름들이 나뒹..

부의/최영규

부의/최영규 봉투를 꺼내어 부의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웅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세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 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랏빛으로 싱싱해졌다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배나 큰 꽃들을 여름내 계속 피워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 반짝이는 껍질의 씨앗 속으로 숨어들고 또다시 꽃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숨쉬는 듯 건강해 보였다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알이 반짝이며 입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따듯한 국/박경원

따듯한 국/박경원 혼자 깨어난 집 안, 화장실로 향하기 전 나는 책이 꽂힌 벽을 한 바퀴 훑으며 눈곱처럼 딱딱한 제목들을 턴다 싱크대에 다가가 먼저 비우고 떠난 시간들을 살핀다 내가 비우고 채워 넣을 여분의 영역과 설거지들의 수위 아직도 식욕을 기억하는 듯 느리게 떠다니고 있는 반찬 부스러기의 종류를 들여다본다 국으로 짐작되는 솥에 손을 얹고서 외출의 거리를 살핀다 안심이다. 따듯한 그녀 아직은 멀리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떠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부리나케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 내가 다시금 조용한 잠으로 가라앉아 있을 싱겁지도 짜지도 않은 집 안에 일요일 한 시 쯤의 바깥 풍경을 방금 버무린 냉이무침과 함께 차려놓을 것이다 왼쪽 옆구리로 몰린 잠을 뒤척, 반대편으로 옮긴다

신발론(論)/ 마경덕

신발론(論)/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 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신발은 인간 존재 자체이다. 신발을 신고 살아야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 온 삶의 흔적을 한 장의 종이에다 기록하고 이것을 이력서(履歷書)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그렇다. 실재로 이력서라는 말의 한문을 풀어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