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언어의 조각사 2022. 9. 19. 21:33

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티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그룹명 > 좋은 글 훔쳐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0) 2022.04.28
산벚나무를 묻지마라/ 임경림  (0) 2022.04.14
물 같은 사랑/ 최승규  (0) 2022.04.01
그리운 약국 / 배정원  (0) 2022.02.28
해묵음에 대하여 / 박경원  (0) 2022.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