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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12회] 겨울 비

어머니가 없는 그리움의 영토에 겨울비 내리던 날 ▲ (삽화=박소향) 겨울 비/ 김영미 봄빛을 풀무질하던 겨울나무는 허공에 걸린 가지를 합장하고 레퀴엠을 연주합니다 머리를 풀고 흐느끼던 숲이 별을 지나쳐 달의 우물을 건드린 걸까 닳은 뼈마디를 숨기느라 잇새로 삼키던 어머니 한숨들이 내려옵니다 맞잡은 손 차마 떨칠 수 없던 그 날처럼 비는 그렇게 하염없이 흐릅니다 백 년의 고독을 안고서 당신도 모르는 길을 가던 숲에서 새의 울음으로 서 있는 건 아니신지요 당신이 떠나던 날 따듯한 추억의 고향도 따라갔습니다 수천 번의 바람으로 당신을 부르면 꿈속에서라도 오시렵니까 나무는 연둣빛을 더하며 내일로 향하는데 슬픔의 영토를 헤아리던 그리움 관성 밖으로 부메랑은 격률의 이별 방식만 돌려보냅니다 [메모] 어머니는 신장암..

참시방앗간 11회-노가리 앞에서

- 내 안의 바다는 너만큼 출렁일 수 있을까 노가리 앞에서/ 김영미 노가리에서 염전 바닥을 스치던 바람 냄새가 난다 달빛을 등지고 들어서는 지아비 몸에서 맡던 그 냄새다 탄력 있던 육체는 욕망과 생존의 습기마저 포획당한 채 가지런히 접시에 누워 참선 중이다 구멍 난 삶으로 오염된 상처를 닦아내듯 애증으로 차오르는 가슴에 소주를 부어 넣는다 채우지 못한 내 안의 갈증으로 열기 오른 입술이 접시를 훑는 사이 몸통에 달라붙어 있던 지느러미가 날개를 펼친다 거세당한 꿈으로 가슴은 염전이 되는 동안 어린 명태들이 술잔을 튀어 오르며 파도를 가른다 짠 내와 갯내도 일렁인다 삼킬 수 없는 바닷물처럼 입전만 맴도는 파도 소리 때문에 난 결국 노가리를 씹지 못했고 마른 몸통을 툭툭 분지르는 손끝을 바라보며 깡술을 마신다..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10회]-연필을 깎다가

어둠도 두렵지 않았던 부모님의 든든한 품안에서 [골프타임즈=김영미 시인] 나는 지금도 만년필과 볼펜보다는 연필로 글쓰기를 즐긴다. 그리고 종이에서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로 내 존재의 마중물인 아버지를 만난다. 다정다감한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의 밤은 어둡지만은 않았다. 등잔불과 반딧불 그리고 달빛과 별빛만으로도 빛나는 추억이 많기 때문이다. 시골 마을 외딴집에 저물녘이면 구석구석 어둠이 깃들었지만, 다정한 어머니와 든든한 아버지의 울타리 안에서, 그 어둠들은 동화 속 도깨비나 호랑이보다도 두렵지 않았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동생들 돌보느라 바쁜 어머니와 함께 숙제와 준비물을 챙기시며, 채굴 막장 노동으로 불거진 손으로 연필을 깍아주시던 아버지. 곱고 매끈하게 깎이는 연필을 바라보던 나는, 꿈나라에서 책가..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9회]-목련

칠판을 빠져나온 목련의 꿈으로부터 [골프타임즈=김영미 시인] 여고 시절의 봄날은 목련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하얗게 헤매던 꿈이 피어나듯, 운동장 한편의 빈 벤치를 환히 밝히던 목련. 교실 밖에서 아우성치던 꽃들의 유희도 뒤로한 채, 그 시절엔 책상과 칠판이 유일한 미래인 줄 알았다. 꽃그늘의 체적은 비좁았지만, 그 환영의 밀도는 짙고도 깊었기에... 바람이 지나칠 때마다 잠깐씩 열었다 닫곤 했던 사월의 페이지. 밀월의 감정들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몸소 체험이라도 하듯, 의식의 미세한 틈으로 유입 되던 여고 시절. 그 시절은 가고, 현실 속으로 밀려난 목련이 불치의 꿈을 부풀린다. 그 때, 칠판을 빠져나오던 목련이 지금 마음의 문지방을 넘어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들녘이 펼쳐놓은 원고..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8회] 인연

조금만 더 견디시길... [골프타임즈=김영미 시인] 출근 인파로 출렁이던 전철 안에서 누군가에게 발가락을 밟혔다. 삶의 무게도 거뜬히 이겨내던 단단한 발은 느닷없는 상처에 욱신욱신 앓다가, 끝내 피멍 든 발톱을 밀어 내고야 말았다. 내 것이었지만 내 것이 될 수 없던 발톱처럼, 엉겨 붙은 삶의 꺼풀들이 어느 순간 내게서 빠져나갔다. 새살이 돋을 때까지 무감각 속으로 뺑소니치던 기억들. 돌아보지 못한 어제가 슬며시 사라지듯, 상처 난 마음도 세월의 파고를 견뎌야 무덤덤한 추억이 되나보다. 자녀의 학비를 보태기 위해서 경기 광주에서 부천으로 출퇴근하던 시절. 떨어져 나간 발톱을 치료할 시간조차 허용치 않던 나날들은 기형의 발톱만 남겼다. 그래도 지금 그 아들과 딸은 국가와 사회의 역군으로 제 몫을 훌륭히 해..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7회] 나는 날마다 홀컵을 지나친다

모두의 마음 텃밭이 싱그럽기를 [골프타임즈=김영미 시인] 봄날의 마늘밭에 골프공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겨울을 견딘 마늘의 뾰족한 잎들이 새의 부리처럼 단단하게 골프공을 물고서... 제 촉수를 숨기고 마늘밭을 차지했던 삭풍과 겨울의 햇살 속으로 메마른 이름들이 지나치고, 들짐승과 참새들 발자취도 스며들었지요. 그곳에 속을 드러내지 않는 골프공이 제 삶의 뭔가를 잃어 홀컵이라도 찾은 듯, 마늘밭 한 편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속을 다 드러낼 수 없는 것이 인생의 무게가 아닐까 생각해 보는 풍경입니다. 삶의 짊은 누구나 다르지만 그 중량감은 각자의 마음에서 작용하지요. 온 몸 가득히 봄을 충전하며, 우리 모두의 마음 텃밭이 싱그럽기를 바랍니다. 나는 날마다 홀컵을 지나친다/ 김영미 골프장 입구엔 위장인..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회] 독도 푸른 비망록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재생시키는 한 페이지 독도/ 김영미 조간신문 속에서도 석간신문 속에서도 역사의 행간을 놓친 독도의 출처가 모호하다 가끔 물새가 날아오르면 파도가 타전한 듯한 낯선 소식이 그 영토다 나는 그 섬이 그리울 때마다 도서관에 들러 제국의 침략역사를 대출받거나 내 젊은 시절의 끝 불면이 깊을수록 더 일찍 깨던 푸른 비망록 한편을 열어볼 뿐이다 살다 보면 봄날은 간다 세파의 파도 너머에서 보일 듯 말 듯 독도도 나의 젊음을 기억해주지 못 한다 언제부턴가 독도가 울면 나는 도시 저쪽의 박물관에서 유물을 탐색하며 근시안을 벗어날 비상구를 찾는다 세파에 희미해진 활자를 접어놓고서 부리나케 거실 한 편 오래전 잃어버렸던 내 젊은 시절의 채널, 독도를 켠다 고문서에 묻힌 망각의 페이지를 애써 재생시키며 ..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4회] 환절기 앓이

안개의 사연들을 생각하며 내일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할 때 [골프타임즈=김영미 시인] 안개가 짙을수록 날씨는 화창하다고 합니다. 안개가 자욱했던 가을날의 새벽은 출근 준비로 바쁜 시간을 감상에 빠트렸습니다. 창밖의 하늘은 푸른 정기가 감돌고, 지상을 덮은 구름은 선계로 가는 길처럼 신비로웠습니다. 순간 신선이 된 듯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던 나의 상상은, 곧바로 안개의 행간에 잘못 뛰어든 이방인처럼 행복을 즐기기엔 늦가을의 낱말들이 모호했습니다. 지금은 아파트 37층에서 신선의 구름을 보았지만, 예전에는 창문 위를 지나치는 발걸음과 승용차를 바라보며 먹구름 속에서 허우적거린 적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시련이나 외부와의 단절로 덜컥 암흑 속으로 가라앉는 긴 여정을 겪기도 하지만, 햇빛이 없다고 ..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3회] 남한산성에 들다

- 한의 역사를 품고 오랫동안 버텨온 희망의 횃불 [골프타임즈=김영미 시인] 지난해 5월 친구와 함께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 둘레 길을 거닐며 오랜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섰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남한산성은 연둣빛 날짜를 넘기며 간밤의 비로 몸살을 앓았는지 꽃잎 양탄자를 펼치며 반겨줍니다.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조선 인조 4년에 대대적으로 구축한 남한산성은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성곽이라고 합니다. 산성의 둘레가 12km에 이르러 산 위에 도시가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라서,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였다니….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그 위엄이 자랑스러웠..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2회] 밤하늘은 깨진 파일처럼 흐르고

[골프타임즈 김영미 시인] 오래전 팔레트엔 블루 & 그레이를 섞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별들의 회의주의와 별들의 희망 주의를 낡은 화실에서 광기어린 넋두리 한 편에 담아 별들을 초대했던, 그 사나이는 과연 어느 별에서 왔던 첩자일까요. 오늘도 나는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별이 되지 못한 별들의 공간으로 내몰린다거나, 삶의 무게가 버거워 회의주의에 빠질 때마다 난시의 그리움을 포기한 하늘에는 늘 고흐가 있었습니다. 누구나 별이 되거나 꽃이 되기를 원합니다. 별은 밤하늘이 있기에 빛을 발할 수 있고 꽃은 튼실한 뿌리와 강한 줄기 그리고 꽃받침의 조력이 있었기에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었겠지요. 나만이 빛나려고 모두가 별이 되거나 꽃이 되려고 한다면, 그 단체나 사회는 광활한 우주의 먼지로 전락하거나 거대한 숲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