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171

시래기-푸른 연대기

푸른 연대기/ 김영미 이곳 어디쯤에선가 몇 줌의 바람과 음지의 날짜들이 발효의 관습을 보내게 될 것이다 흰 몸통의 줄기 가까이 이르러 파란 기억을 머금은 그쯤을 움푹 자른다 시래기, 나는 잠시 오래전의 농경이 가르쳐준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곤 벽 양쪽에 줄을 매단다 봄이 더디게 들어찰 뒤꼍 근처가 무청들의 물결로 눈부시고 그래, 먼 옛날의 어머니도 당신의 월동 한편에 먹거리를 섬겼을 것이다 겨울이 길어야 맛의 질서를 더 깊이 품어내던 바람과 바람 음지와 음지 사이의 영험한 내력들 어머니의 아침이 늦겨울 장독대에서 된장을 퍼오자 발효를 마친 시래기 몇 움큼 부엌 함지박으로 들어서고 그날 잘 떠지지 않는 내 눈을 깨워주던 아궁이 불씨는 어느 동화 속 이야기였을까 늦겨울 아침의 식욕은 늘 아버지의 시장기로부터 ..

시작노트 2022.11.29

흰밥도 눈물을 흘린다

흰밥도 눈물을 흘린다//김영미 아버지의 온기가 구들장 내력을 묶어놓은 오전 누군가 시루 속 콩나물을 깨워 놓고 간, 참 이상도 하지 문종이를 통과한 햇살의 잔영에도 제 음표의 고개를 드는 그 빛나는 여백 속에서 내가 꿈꾼 것들은 어떤 허기의 아랫목을 기억하는 걸까 ‘열려라 흰밥’ 그 순간 아버지의 부피를 젖히고 담요 속에서 들췄던 건 작은 세례명 참 이상도 하지 밥을 열자 뚜껑 안쪽에 숨겨진 눈물, 검은 오지의 깡마른 아이 눈망울에서 꼿꼿하던 아버지의 고개 숙인 음표들이 디지털 밥솥의 경적을 울리며 내 안으로 들어선 후에야 눈부신 아버지 눈물이 보이는 것은, 2022.11.14. 2023년 6월-모던포엠 이달의 작가 2024년 한국창작문학인협회

시작노트 2022.11.14

가을단서

가을단서/ 김영미 바람이 분다 몇 줌의 잎들이 내 의식의 지퍼를 열고서 뭉텅뭉텅 빠져나오는 듯한 오후 저쪽에서 바람이 분다 창은 이럴 때 늘 함구를 택한다 커피는 내가 새벽의 꿈들을 머릿속에서 다 몰아낸 뒤에나 끓을 것이다 기다림이 왜 오랫동안 거실에서 풍토병처럼 동거하는지 커피를 끓이다 보면 알게된다 가을의 단서, 나는 창밖 풍경들이 나무에게 금지될 때마다 바빠지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스마트폰의 숫자들과 오후의 잠을 줄이고 컴퓨터와 블랙홀을 서핑하다가 몇 개의 스팸들과 싸우곤 다시 거실로 나온다 내 의식의 떨켜를 간질이는 커피향은 붉은 나무 모퉁이를 돌아서 주소불명의 엽서를 빈 잔에 풀어 놓는다 2022.10.09 2023년 6월-모던포엠 이달의 작가,2024시와수상문학 동인지

시작노트 2022.10.26

환절기

환절기/ 김영미 일교차가 다녀간 새벽 저 흰 무리들은 불면의 자객이었을까 창과 밖의 거리는 지워지고 구름 위 하늘만 푸르다 몇 개의 아파트와 건너편 숲이 흰 통증 속에서 벗어나고 무겁게 멈춰있던 은행나무 잎들이 노란 전설을 찾지 못한 채 하나씩의 가로등을 풀어 주고 있다 순간 내가 신선인 듯 몽환의 길에 든다 불면으로 휘청이던 새벽 구름 속 37층은 공중부양 중이다 어둠은 그늘조차 파종할 수 없는 것 달빛에 감긴 간밤 꿈이 계절을 염탐한 안개와 함께 가로등 안으로 사라진다 더 깊은 곳으로의 은신과 묵정의 날들을 견디는 동안 1층에서 37층을 오르던 세월의 간극도 사라졌다 안개 속에서 여름날의 단서를 찾는 동안 태양은 때늦은 나의 독백을 공중으로 밀어내고 창밖 풍경을 말끔히 펼쳐놓는다 태양의 울타리 안에서..

시작노트 2022.09.22

그늘의 시간을 보다/김영미

그늘의 시간을 보다/김영미 얕은 산속을 산책하다가 문득 눈이 띈 버섯무리들, 현란함으로 보아 독버섯임에 분명하다 노란빛 혹은 형형의 색채 속에서 독성의 날들을 보낸다는 것 썩거나 죽은 나무의 그늘을 섭취하며 햇살의 반대편을 느린 생애로 버텼을, 내 안의 사랑도 그랬을 것이다 무례한 감정의 방문과 현란한 타협을 요구하는 젊음의 뒤안길에서 나의 사랑도 아픔들 상처들을 보호하기 위해 독성의 은신처를 빌려야 했으리라 사랑은 독이다 아니, 내 안의 느린 시간을 보호하기 위한 썩은 양분들이다 습기 찬 계절 속을 서성인다는 건 얼마나 찬란한 관습이던가 나는 그늘들의 시간을 지우고서 밤의 입구 이슬들이 몰려오는 또 다른 감촉들에게 귀를 적시기 시작한다 2022년 문학청춘 발표작 2022년 착각의 시학 사화집

시작노트 2022.08.30

낡은 풍경에서 깨어나다

낡은 풍경에서 깨어나다/김영미 고택에 든다 쇠락한 시간이 이곳저곳 널브러진 조그마한 안마당이 주춤 기억의 뒤로 숨고 뒤꼍으로 향하는 처마 옆 살구나무만이 노란 인사를 하는 곳 이제 다시는 청빈의 주소를 꿈꾸지 않으리라던 쓸쓸한 독백과 절구 속 봄날의 가난을 눈물로 빻던 곤궁한 푸념들이 되살아나고 어쩌면 이맘때는 아니었을까 내가 논두렁 너머로 곡선의 심부름을 하며 아버지의 막걸리에 취한 그날 오후와 풀잎처럼 지친 몸을 맞이하던 고택의 지조 방금 뒤꼍을 한 바퀴 돌아 나온 바람에도 단추 같은 열매를 몇 개 내줄 것 같은 늙은 감나무 풍경을 상상해 보는 일 고택은 그러나 고택을 꿈꾸지 않는다 낡은 풍경을 복사하지도 않으며 그렇다면 지금 고택이 꿈꾸는 건 정작 무엇일까 맨 처음 자신 속에 주소를 열었던 바로 그..

시작노트 2022.08.13

노숙자

노숙자 김영미 빛들의 사각지대 희망이 엿볼 수 없는 곳에 사내 하나 멈춰있다 아침 출근길 혹은 저녁의 분주한 약속들의 저지대를 몇 모금의 알콜 몇 줌의 절망을 덮고서 긴 수면 속을 뒤척인다 도시의 모퉁이에서 주워온 절망이 덜 탄 담배꽁초를 만지작거리며 낮과 밤이 중단된 후미진 안쪽을 성지처럼 지킨다 그의 출처도 처음부터 지하의 주소는 아닐 것이다 크고 작은 주말이 종교였으며 달력의 날짜들은 오래가지 않아 추억으로 바뀌던 시절, 해바라기가 없었다면 공중의 햇살들은 어디로 몰려가서 실낙원을 쓰고 있을까 햇살은 또다시 원죄를 덮고서 해바라기에게 돌아올 것이다 저 사내도 분명 서풍이 불었거나 아내의 생일이 잘 보이는 달력의 날자 속으로 출퇴근했을 것이고, 지금 도시는 미지수다 2022.07.19 시작메모----..

시작노트 2022.07.20

오월의 양식 / 김영미

오월의 양식 / 김영미 체칠리아 봄날에 못다 낸 헌금이 궁금해 성당 근처를 산책한다 5월, 말씀이 될 열매를 찾는다는 건 햇살을 어기는 일이거나 또 다른 고행을 택해야 한다는 걸, 나는 안다 그렇다면 나는 햇살이 성서를 들렀다가 지상으로 온 것을 승복하는 것인가 가끔씩 내 새벽녘의 고난을 만나기 위해 성당 근처를 서성인다 겨울의 산수화와 덜 붉은 말씀들이 회개하라 회개하라고 했던 그 많은 계절의 페이지 속을 헤맨다 헌금은 내 이름의 가장 어두운 원죄가 올리는 햇살들의 방언이 될 것이다 오전 10시의 새들은 날아오를 것이고 또 다른 양식을 찾기 위해서 5월의 장미 속으로 걸어갈 것이다 2022년 5월 28일 성모의 밤을 향한,

시작노트 2022.06.15

그늘

그늘/김영미 그늘/김영미 몇 개의 사과가 햇살들의 낙원을 외면한 채 만유인력을 툭, 떨어트렸다 봄날, 벌들의 계획이 무너진 것이다 어차피 봄에 꿈꾼 것들은 가을이 되어 생의 낮은 가장자리에서 그리움을 밀쳐내고 그늘로 돌아가는 법, 몇 날의 만유인력을 떨군 가을 나무 밑에는 지상의 아버지가 지친 그늘 하나 펼치고 있다 22.05.23 사진제공: 김삼복사진작가

시작노트 2022.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