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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56회] 핸드폰 해체하면 나를 찾을 수 있을까

핸드폰 해체하면 나를 찾을 수 있을까                                                김영미 나는 가상 세계의 여행자온종일 핸드폰 속에서 산다입을 잃어버린 세상의 말들은비눗방울처럼 화면 속을 떠돌고 들꽃들 향기로 아우성치는 창밖사과 익는 내음에 분주하던 벌들을 놓치고딸기스무디 레시피를 따라가다영상으로 만나기를 즐긴다 실재하는 세계를 유기당한 채뇌 속에 저장되던 기억을유심칩에 맡겨두는 블랙홀에 빠지고 잠 못 이룬 밤의 늪에서새벽을 열어준 너는장마가 시작된 지구 밖의 염문과녹고 있는 빙하를 보여주고 있다 만일 노아의 방주가 있었다면너부터 구원했을까 핸드폰과 나분리불안을 앓는 아이너는 나를 분석 중이다핸드폰 해체하면 나를 찾을 수 있을까 [作詩메모]핸드폰과 친숙해지면서 기억..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55회] 시인의 궤양

시인의 궤양 / 김영미 상상은 종종 구토증을 앓는다서사의 앞뒤가 맞지 않아고뇌의 서재에서 밤을 새우며은유라는 화석 앞에 이르러서는  연대를 알 수 없는 감성에 빠지기도 한다 꽃이 계절을 넘는 방식과씨앗 하나로 겨울에 은신하는 법어느 봄날 산역(山役)을 마친 후홀로 남은 뻐꾸기 울음소리와무시로 가을의 가장자리에 피었다 지던 소국은어느 천사가 쓰다가 만 비망록일까 이럴 때 나는 외치고 싶다허약한 육체에는산소와 영양을 보충하면 된다지만소화불량을 앓는 원고지 앞에서는어떤 처방전을 받아야 할까 수많은 날의 밤을 별과 지새우며울창한 숲을 완성한 원로작가의 잉크병에는얼마나 많은 문장이 강을 이루고 있을까          염증으로 신열 오른 내 문장들은삐뚤삐뚤 비틀대는 곡예로 서툴지만나무가 삭풍과 폭설을 견디고 꽃 피..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54회] 추억의 배신자

추억의 배신자/ 김영미 생태공원이 된 호암지를 거닐다오리배를 타던 젊은 시절이 떠올라가슴이 쿵쿵 뛴다 호수는 잘못 들른 구름이몇 줄의 편지를 쓰다가 남긴 추신‘나를 잊지 말아요’ 호수가 거울이 되지 못하는 건추억을 버리지 못한 구름 때문이라고내가 가난해서 보내야만 했던평행선처럼 닿지 못한 그 사랑은멀지 않은 곳에서 물가를 찾아추억이 된 풍경을 튕긴다 안개는 그 사내의 기타 선율처럼물가에 독백으로 서리고바람에 흩어지는 물결의 페이지를 넘기며붉어진 눈망울로 지난날을 펼친다 노을을 등진 산 너머오두막이 있을 것 같은 그곳에서도나를 잊지 말아요붉은 가슴 하나 호수를 물들인다 [作詩메모]첫 새벽을 깨워 올라탄 기차가 여행의 첫 출발이라 생각할 때가 있었지요.충주여고 맞은편에 있는 호암지가 지금은 생태공원이 되었지..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53회] 시시한 관념에 갇히다

시시한 관념에 갇히다/ 김영미 고급 레스토랑에서우아한 격식을 갖추느라진솔한 맛 느낄 새 없이 더부룩한 가슴할머니와 엄마가 차려주던소박하고 투박한 밥상을비싼 값 치르고야 그리워하다니헛배 부른 날들을 게워낸다 뿌리 깊지 못한 시심의 나무는한여름 햇살의 생채기에처진 이파리를 감출 수가 없다은유와 아이러니를 포장하기 위해진정성 잃은 공복감에 전율하는 문체들이메마른 잎사귀를 떨군다 꽃은 이미 품절 되었고바람이 걸러낸 잎새들이잎파랑이를 모아들이는데광합성을 찾아 헤매는 나무는시인이란 인용문을 떨어트린다 할머니 손맛처럼 따듯한 서정으로시 쓰는 사람이 되고픈조바심 토닥이는 목마른 가슴으로가을 볕뉘가 뿌리내린다 [作詩메모]가끔은 넝쿨들을 쫓아다니며 한여름의 불화를 헤집고 낯선 숲에 도착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을은..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52회] 층을 허물며

층을 허물며/ 김영미 창녕 박물관에서 보았던가야 소녀 송현이그 금동 귀걸이에서 번지던샛노란 현기증은행나무 화석을 보듯 요동치던 가슴 길을 걷다가 가을을 펼쳐 읽으면낙엽은 건반 되어봄물 밀어올리는 소리 들린다 켜켜이 쌓인 낙엽의 퇴로에서쉽사리 자신을 내주지 않고지상을 떠도는 은행나무 잎들 층층이 쌓인 어두운 무덤 속동료들과 더불어 16세기를 빠져나와유네스코 세계유산에실체를 드러낸 가야 소녀가 속삭인다 무릎 꿇은 소녀의 정강이뼈는햇살과 바람의 생채기 견디며일그러진 은행나무 줄기처럼남은 수액조차 온통 빠져나간 공터순장의 장송곡으로 번진다 나는 어쩔 수 없이샛노랗게 나뒹구는 화석을 밟으며층층이 쌓인 역사의 뒤안길을 서성이고 화로 앞에 둥그러니 모여손바닥을 뒤집으며 안부를 나누던사랑방 같은 온기가 그리워늦가을 한..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51회] 눈 내림 현상

눈 내림 현상 / 김영미 첫눈이다먼저 바깥 동정을 느낀 k는 블라인드를 열었고곧 그칠까 긴장한다첫눈은 언제나 이국의 소녀처럼호기심을 부풀리다 알 수 없는낮은 억양으로 쌓이다 간다안개꽃이 되려다 커피 내음에 가려졌던오래전 낡은 카페의 대화처럼 사라진다 첫눈이다, 나는 중얼거리곤k가 자리를 비운 창가로 간다그는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지난겨울에도 자신의 종적을 지우고마지막 눈이 내리는 날 돌아왔다 첫눈은 첫사랑의 기억처럼현란한 착시를 일으킨다방금 자리를 비운k의 시간도 얼마 못 가서블라인드 밖의 첫눈을마지막 눈으로 바꿔 놓고는곧 돌아올 것이다처음은 마지막에서 기다리는시작의 방점이 된다요철을 넘어오듯풍경 속의 과녁을 찾을 듯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계절의 숨소리 [作詩메모]땡볕과 비바람을 견디며 한철 상처..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50회] 라일락현상

라일락 현상/ 김영미 라일락 나무가 있는 골목은 한낮에도 어둡다기억들이 어둡고전신주에 묶인 주소들도 어둡다때론 봄도 하품하며 몇 걸음으로 지나친다초록 대문 안에서개 한 마리가 컹컹 짖어대자라일락은 깨어나발칵 제 향기를 퍼뜨리기 시작하고집안의 고요가 깨지며 잠시 창문이 열렸다 닫힌다 열렸다 닫히는 순간먼 옛날의 외판원을 소환한다소설책 몇 권 들고 와그 속에서 라일락의 페이지를 꺼내서흰빛의 생애를 설파하던 시절을 기억하는 일 어느 누가 라일락을가을 속에서 찾아낼 수 있겠는가세월이 흐를수록 라일락은 더디 갈 것이다 최루탄에 고장 난 봄이 좀체 켜질 것 같지 않던 시절엘리엇이 황무지에서 발견한 라일락을 던져 준초록 대문 안으로 잠입한 그 전단지지금 광화문을 흔든다 [作詩메모] 당신의 봄은 안녕하십니까한동안 봄의..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49회] 고흥 장터에서

고흥 장터에서/ 김영미   하루치 바다를 함지박에 담아은빛 지느러미 몇 개 풀어 놓는 곳세상의 흥정들은 이곳에 와서 발을 멈춘다링거액처럼 줄어드는 아버지 일대기는거친 풍랑을 견디고도 만선한 기억인데이마트에서도 롯데마트에서도그리움의 바코드 찍지 못하는뜯겨 나간 페이지 속 기억의 낱장들 누군가는 전생의 여독이 보부상처럼 떠돌아야겨우 닿을 수 있다 하고누군가는 후생에서나 돌아갈 수 있다는 곳유자향이 돌아와야 어시장이 깨어난다던생물로 팔려나가던 바다가 고흥에선구이가 되어 넘겨지던 풍습이 불꽃을 피운다 소금기가 희미한 날설령 바다가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에 끌려온그 혼신의 형체가 될지라도더 이상 거짓 없는 새벽에 이르면사라진 연기 너머에 무엇이 보일까 아버지 후생의 어느 여울목에자식들은 은빛 지느러미 되어아버지 ..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48회] 언어의 순례자

언어의 순례자/ 김영미 밤하늘은 별들의 주유소다나는 신생의 별들과 먼 길을 떠나기 위해몇 개의 성좌를 여행지로 지목하며바코드를 찍는다 떠나도 떠나도 보이지 않는 세계곧은 의식으로 잡히지 않는 거리나 오래전에도가을이라는 쓸쓸한 계절의 폐허를헤매며 살았다 밤하늘을 여행하는 일은알을 깨지 못한 벙어리시인 가슴에윤동주의 북간도와 고국의 어머니가 복사되는눈물겹게 아름다운 지상의 감옥이 아닐 수 없다아픈 기억만이 앞을 가로막아다른 세계는 열리지 않는다 밤하늘을 순례하는 일은내가 너무나 자만해 왔던 모국어그 속에서 헤매는 위태로운 문장 같아하나의 공간에 하나의 관념만 꽂혀새로운 세계로 전환이 되지 않는다 저, 눈으로 보이는 밤하늘 [作詩메모]립스틱을 바르며- 예전의 밤하늘은 슬프리마치 아름다운 윤동주 시인의 삶을 내..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47회] 성스러운 못

성스러운 못                     김영미 서실의 못은 어떤 무게로 박혀있을까어쩌면 표구 속 글자의 무게를 견디느라노역을 치른다는 생각에더는 가닿을 수 없는 형주를 맴돌다먹물 든 행태를 태운다    못 박힌 경전을 추적한 적 있다그때마다 거리 저쪽 서점들을 빠져나와불면으로 밤을 보내거나 방황하기도 했지만골고다로 간 부활의 길을 상상하며남루한 삶 한쪽 벽에 갇힌 촛불은제 몸을 허문다 삶 속에 켜켜이 쌓인 상흔이고단한 육신에 박혀 할 말이 많은 듯필사적으로 벽을 붙들고 있다태생이 뾰족하고 무모하다 보니가끔 구부려질 때도 있지만본분은 구부리지 않는다 늙은 거리의 악사 바이올린 소리내 영혼을 못질하며 서럽게 박힌다그가 벗어놓은 모자 속 은전들이햇살을 퉁기며 비늘을 드러낸 오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