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부의/최영규

언어의 조각사 2022. 2. 9. 20:17

부의/최영규

 

봉투를 꺼내어

부의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웅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세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 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랏빛으로 싱싱해졌다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배나 큰 꽃들을 여름내 계속 피워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 반짝이는 껍질의 씨앗 속으로 숨어들고

또다시 꽃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숨쉬는 듯 건강해 보였다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알이 반짝이며

입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봉투를 가만히 올려 놓았다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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