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론(論)/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 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신발은 인간 존재 자체이다. 신발을 신고 살아야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 온 삶의 흔적을 한 장의 종이에다 기록하고 이것을 이력서(履歷書)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그렇다. 실재로 이력서라는 말의 한문을 풀어보면, ‘신발(履)’를 끌고 온 역사(歷)의 기록(書)’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로 '고무신 거꾸로 신기'라는 말은 사랑하는 상대가 변심한 경우에 사용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운 사람의 신발 끄는 소리(예리성 曳履聲)가 들리면, 버선발로 뛰어나간다.” ‘신발을 신을 틈이 없이 달려 나가야만, 아니 자신의 온 존재를 벗어 놓은 채 달려 나가야만 완전하게 그리운 임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람들은 강가에 신발을 벗어 놓은 채 물 속으로 뛰어든다. 왜 그럴까? 신발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신발의 고무 밑창 하나가 우리와 대지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대지는 인간이 장차 돌아가야 할 곳이다. 더이상 신을 신지 못하면 죽는 것이다. 오늘도 신을 신고,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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