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한 국/박경원
혼자 깨어난 집 안,
화장실로 향하기 전 나는 책이 꽂힌 벽을 한 바퀴 훑으며
눈곱처럼 딱딱한 제목들을 턴다
싱크대에 다가가 먼저 비우고 떠난 시간들을 살핀다
내가 비우고 채워 넣을 여분의 영역과 설거지들의 수위
아직도 식욕을 기억하는 듯 느리게 떠다니고 있는
반찬 부스러기의 종류를 들여다본다
국으로 짐작되는 솥에 손을 얹고서 외출의 거리를 살핀다
안심이다. 따듯한 그녀 아직은 멀리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떠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부리나케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
내가 다시금 조용한 잠으로 가라앉아 있을
싱겁지도 짜지도 않은 집 안에 일요일 한 시 쯤의 바깥 풍경을
방금 버무린 냉이무침과 함께 차려놓을 것이다
왼쪽 옆구리로 몰린 잠을 뒤척, 반대편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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