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놓았거나 놓쳤거나 / 천양희

언어의 조각사 2019. 12. 9. 15:39

놓았거나 놓쳤거나 / 천양희

 

내가 속해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 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 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뿐이다.

물에도 결이 있고.

침묵에도 파문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사람이 무서운건 마음이 있어서란 것도 미리 알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가가 되지못해 누구나가 되어,

인생의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이지.

돌아보니 허울이 허울만큼 클때도 있었다.

놓았거나 놓친 만큼 큰 공백이 있을까.

손가락으로 그걸 눌러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쓰고야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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