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해묵음에 대하여 / 박경원

언어의 조각사 2022. 2. 16. 22:39

해묵음에 대하여 /  박경원


원래의 길이 지워진 녹슨 나사를 풀다가
나는 보았다, 녹이 벗겨지고 잇몸만 남은 수나사에 비해
아직은 생생히 남아 있는 암나사의 해묵은 틈,
이가 주저앉은 자리마다 세월의 꽃이 피어 원래의
청춘을 버리고 그리움의 뒤안길로 견뎌온 우리들의
녹슨 골목길도 함께 보인다.
빠진 못자리처럼 녹슬고 지친 눈빛을 닦으며 돌아오는 길
나무 아래 작은 벌레들의 울음에도 헐거운 발길을
곧추세우는, 평생 샛길 한번 내지 못한
골목과 골목 사이 우리들의 작은 풍경.
문패가 바뀌고 늦은 귀가의 흐느적한 노랫소리 지워졌어도
그쯤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텅 빈 정적을 흔들어 깨우는
습관의 해묵은 자리는 깊은 밤 떠난 사람 아닌
우리들의 몫이다.
밤새 서성이던 골목도 잠들어 이제는 눈 좀 붙여야지, 하며
혼자만의 일상에 머리를 낮추는 짧고 나른한 잠의
담장 너머…한 폭 수채화처럼 걸리는 아침 햇살.
긴 잠에서 풀려나는 심장의 박동과 눈곱에 매달린
하루의 무게를 다스리기 위해 몇몇은 수돗가로 혹은
십분만 더, 하며 쥐죽은 듯 물러나는 해목은 틈, 닦고 털어내도
녹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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