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지금 이 순간

언어의 조각사 2018. 12. 6. 08:12

지금 이 순간

                            김영미

 

낡은 추억을 들추자 우울로 처진 축대 밑으로 소녀가 지나치고 소녀의 바람을 훑고 간 골목엔 애달픈 아내눈빛을 걸친 중년의 처진 어깨가 걸어간다

벽과 벽 사이로 꽃은 지고피고 푸른 날을 놓친 허기진 세월의 나이테가 좁은 길을 잇고 있다

아픔 없이 지워지는 생의 페이지는 없다 가슴에 쌓인 망각의 퇴적물도 한땐 세상을 빛나보이게 하던 감성의 부스러기였다

 

지금 시련이 먼 훗날 꽃으로 피어난다는 망상은 버리자

막연한 꿈은 오늘을 분실한 변명인거야

오늘을 단단하게 채우고 모두 비우려 하지는 마

꽃씨는 품어야 해

내일을 밝힐 기폭제가 있어야 

아픔도 삶으로 발현되어 생의 페이지가 싱싱해지지

온기 있는 미소로 처진 어깨를 감싸주며

지금 웃는 거야

그 순간 가슴에서 꽃이 피고 있잔아

 

2018.12.05

모던포엠 19.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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