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붉다는 건

언어의 조각사 2018. 10. 6. 10:22

붉다는 건

                           김영미



한 계절이 붉은 칩거에 들어간다

새콤 달달한 안부가 겨울 밖으로 멀어지는 사과밭

봄의 첩자가 은신하던 씨앗은

팔월의 태양과 벌들의 노래가 어우러진 꽃의 화석이다

열매가 되지 못한 날들은 꽃의 과오가 아닌

그 폐허를 거치지 않은 벌들의 방심이었다

오늘도 유폐된 꽃의 언저리에 세상의 허기들이 쌓인다

주름 깊은 늙은 길에서 태양이 떨군 심장을 줍는다

무너져가는 이름들 사이 잔망스런 기억의 사과밭을 걸어간다

나무 아래 개미의 길에는 사과꽃이 있었고

개미들 발자국이 꽃으로 피어나던 숨 막힌 행보를 당겨본다

꽃신 벗어놓고 사라진 것들이 궁금해지는데

열매는 꽃에 대한 가장 오래된 상속자라고 누군가 말한다

과육을 베어 문 붉은 가슴에 사과꽃이 핀다

 

18.10.03  

   붉음은 풋기 덜어낸 열정과 유혹이다.

세상을 관조할 만큼 잘 익어 붉어지는,

미를 추구하며 열정으로 살다 보면

노년에 이르러 붉음의 미학을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양이 은신한 잘 익은 사과처럼 향기로운 삶,

벌들이 머물 수 있는 영혼으로 시맥을 찾아 정진하다 보면

어설픈 내 문장들이 붉고 단단해질 수 있을까?

 

 

2018 착각의시학 사화집. 21,한국문인육필걸작선.경기문학21

시마을 21.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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