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171

동지

동지 / 김영미 12월이 죽었다 한 줌 햇살도 허락되지 않던 음지 눈뜨면 생생하게 되살아 알 수 없는 소멸의 빛이 못질하는 야광의 날들 틈새로 새어들던 물세례와 물소리 걸러낸 어둠 속에서 투명한 음표들이 비상의 깃 편다 꿈을 꾼다는 건 증명할 수 없이 깊숙이 뻗은 뿌리의 알리바이를 헛짚는 일 햇빛이 콩나물과 눈 맞춤 않고 즉사한 12월, 밤이 낮보다 긴 날의 눈 내린 거리는 봄을 예열 중이다 너와의 어둠이 길게 드리운 날 한마디 위로 대신 봄 햇살 그득 담아 서럽도록 시원한 물 한 바가지 콩나물에 쏟아붓는다 어둠 속에선 음표들이 발돋움하며 숨 고르는 중 2020.12.21 동짓 날

시작노트 2021.03.30

직선의 계보

직선의 계보 / 김영미 흐린 날짜들을 빠져나온 햇살은 몇 줄의 직선을 통과했을까 빨래는 곧게 말라가고 있다 흐린 날 엄마는 직선을 말리지 못해 눅눅한 오전을 끌어내 길게 널곤 했다 그런 날이며 부엌을 빠져나온 연기가 집안을 꼬불꼬불 휘돌아 나가고 곤궁한 근심들은 더 낮은 곳에서 꾸물대곤 했다 잘 마른 내 새벽잠은 하늘 입구에 꿈을 펼쳤지만 나무와 잎새들의 낡은 시간을 태우며 허공을 헤집어 연기를 말리던 엄마는 매캐한 눈물편지 연기에 실어 보냈으리라 낮은 담장을 넘어선 연기처럼 가벼워질수록 더욱 깊이 되살아나는 지난날의 속살들 어릴 적 굴뚝을 통과한 엄마의 편지는 딸과 딸의 딸 숨결로 이어져 사랑의 메아리 하늘에 닿고 팽팽하게 말라가는 아기 빨래들이 하늘과 땅에 직선의 편지를 쓴다 2020.12.23 **..

시작노트 2021.02.22

동지

동지/ 김영미 12월이 죽었다 한 줌 햇살도 허락되지 않던 음지 눈뜨면 생생하게 되살아나 알 수 없는 소멸의 빛이 못질하는 야광의 날들 틈새로 새어들던 물세례와 물소리 걸러낸 어둠 속에서 투명한 음표들이 비상의 깃을 편다 꿈을 꾼다는 건 증명할 수 없이 깊숙이 뻗은 뿌리의 알리바이를 헛짚는 일 햇빛이 콩나물과 눈 맞춤 않고 즉사한 12월, 밤이 낮보다 길다는 눈 내린 거리는 봄을 예열 중이다 너와의 어둠이 길게 드리운 날 한마디 위로 대신 봄 햇살 그득 담아 서럽도록 시원한 물 한 바가지 콩나물에 쏟아붓는다 어둠 속에선 음표들이 발돋움하며 숨 고르는 중 2020.12.21 동짓날 -21.착각의시학.봄호. 21,한국문인육필걸작선. 경기문학.21

시작노트 2020.12.21

스민다는 것

스민다는 것/ 김영미 구름의 사연 하늘 끝에 걸어놓고 꽃들이 등 돌리는 계절, 포구 가득 스며든 권태와 졸음들이 여름날의 함성 잠근 바다를 건너와 비릿하게 접시에 눕는다 그 가녘으로 낮게 흐르던 파도는 빈 술병에서 추억을 앓고 화려한 수사들이 날개 접은 겨울 바다는 마른 꽃잎에 닿는 바람처럼 스산하다 과거는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아 흑백으로 여과되면 풍경이 된다 펄떡펄떡 날뛰던 열정의 날들을 초장에 찍어 삼킨다 짜르르 퍼지는 알콜이 목젖에 걸린 하루의 위로가 되는 날 꽃 진 자리 적시는 부서진 구름과 씨알 불리며 하얗게 부서지는 저 웃음들은 어쩌면 아픔일지 모를 일이다 세상 저쪽 삶의 파고를 안고 모래 속으로 스며들던 바닷물처럼 하루 치 성과급에 현기증 나는 가슴속 식어가는 태양을 꺼내 성냥을 긋는다 2..

시작노트 2020.11.23

숯 빛 기억 속에는

숯 빛 기억 속에는 김영미 지금 당신은 여든다섯 세월의 여울목을 찾고 계십니다 온기 희미한 햇살 등 돌리고 앉아 삶의 마지막 시간을 거스름하고 있습니다 육신이 무뎌진 후 암세포마저 더디 동행하는 어머니의 한때 미간 사이엔 치매의 흔적을 애틋하게 모아 놓고 세월 저쪽을 가지런하게 넘겨다봅니다 어디 모성의 강을 건너와 마르지 않은 가슴 있을까요 그래서였을까 그런 당신이 야속해 연어들의 삶을 떠올리던 나의 삶도 어쩌면 당신이 건네준 작은 방황이었을지도 모를, 헐거워진 기억의 빗장 부여잡고서 행여 자식에게 짐이 될까 세상 저쪽 길을 재촉하며 기도하던 어머니를 나는 잊고 살았습니다 지금 당신은 육 남매 얼굴마저 낯설다 하십니다 생사의 경계에서 줄다리기하며 기도하는 밤, 달빛 젖은 강 너머 욕망의 빗장 풀고 시소 ..

시작노트 2020.10.22

장마

장마 김영미 유월은 새들의 소리조차 귀를 닫는다 구름의 골방에서 쓰다만 편지지에 뒤늦은 비의 추신을 적고 있거나 곰팡이 사생활을 들춰 보던 은신의 날들도 손전화 속 무음으로 잠근다 불시착한 구름이 수시로 드나들던 거리 저쪽의 우산들이 슬프리마치 숙연하게 조등을 밝힌다 호국영령 날개를 접은 지상의 날들이 침묵하는 사이 새들은 떠났고 밤새 서성이던 발자국을 빗소리에 새겼을 장마는 고단한 태양을 재우는 구름이 건네는 경전이다 유월의 길목에서 비의 추신을 들추자 침묵하던 문장들이 날개를 푸득인다 푸른 선혈로 고국 산야를 적시던 지면을 벗어난 그 날의 서곡처럼 분단의 벽을 타고 흐른다 골 깊은 이념의 봇물 터놓을 듯 하염없이 비는, 20.06.29

시작노트 2020.07.01

추억 당기기

추억 당기기 김영미 유월, 햇살을 퍼 나르는 보리 내음이 빛난다 오전 내내 곡선의 미학을 서성거리던 몇 개의 논두렁들 오후가 되면서 시든 풀빛으로 낮아진다 유월이란 누군가 그리다 만 유화 같은 것 산비탈을 지키는 몇몇의 비문만이 산꿩의 긴 울음을 삼키고 있는 오후 농경을 빠져나온 자전거 하나 외진 속도를 재촉하며 마을로 사라지고 왜일까 먼 옛날의 기억을 등 돌리며 사라지는 풍경 속에서 내가 발이 저리도록 서 있어야 하는 그 이유는, 나 저것들을 지키기 위해 더 더딘 속도로 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하리 해마다 유월이 오면 달거리 하듯 낡은 주소 속 엄마를 그린다 보리 이랑 깜부기 같은 기억의 강 너머 나무 그늘에 앉아서 햇살을 호미질하는 엄마 바라기 어린 소녀는 아직도 풋기 덜지 못한 유월의 감나무 밑을 서..

시작노트 2020.05.25

가닿다.2/코로나

가닿다.2 김영미 먼 곳을 다녀온 언어가 낯설다 나도 멈칫 눈빛이 흔들리고 꽃들도 한걸음 물러난다 칸칸이 달리는 버스유리의 건너편 표정들도 어디론가, 어디론가, 그렇다면 햇살들이 찾고 있던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봄은 더디 갈 것이다 성장기 때 누군가 건네주던 의문의 말들도 천천히 늙어갈 것이다 어제 본 버드나무는 바람의 행방을 개의치 않을 것이고 조금 전 그 표정들이 초상화가 되는 것도 잠깐일 것이다 세상, 모든 버스의 행방들은 착하다 유리의 평면 속으로 빠르게 다가왔다가 추억처럼 과거가 되는 표정들 어제이거나 오늘이거나 검은 봉지 속 시장기는 나를 비릿한 조바심으로 들뜨게 하고 누군가 열어 놓은 한 칸 크기의 창을 통해 꽃멀미가 몰려온다 다시금 먼 곳을 다녀온 언어가 낯설음의 천형이라도 ..

시작노트 2020.05.19

고흥장터

고흥장터 / 김영미 짓눌린 생의 지반이 출렁이는 새벽 어판장은 푸른 눈빛으로 활기차다 온밤 발갛게 달군 하루 치 석쇠에 바다를 굽는다 거친 손마디 굴절된 여정으로 노곤한 전대엔 막내 등록금과 손주들 과자값이 행복의 연기를 피워 올리고 거친 파도 헤치며 낚은 어부의 바다와 발 부르튼 삶을 버무린 풍파를 견딘 생이 맛깔스럽다 좌판을 펼쳐놓은 고흥 뜰이 어판장 넘나들던 바람 앉혀놓고 하늘 너비를 흥정하는데 장터 골목으로 들어선 햇발이 펄떡펄떡 뛰놀던 눈빛을 복사해 온누리 바다를 출력 중이다 19.09.08 미리 성묘를 마친 남편과 함께 간 고흥의 장터는 추석맞이로 활기차다. 새롭게 증축중인 고흥전통시장 뒤편에 자리 잡은 상인들은 반건조생선을 굽느라 분주하던, 그 고흥 장터의 소묘를 옮겨본다. 모던포엠19.12월호

시작노트 2019.09.10

능소화

능소화 김영미 제 몸 사다리삼아 나른한 여름날을 허공에 옮겨놓고 등불을 켠다 하늘에 닿지 못한 발 저린 사연 툭 떨구고 빛을 향한 사다리 늘이는 궁벽을 감싸는 오체투지다 온몸 사르며 한여름 밝히는 저 꽃빛 가슴에 담아 세상과 다투던 폐허에 꽃 피울 줄기 뻗을 수 있기를, 꽃들이 잡아당긴 허공은 굴절된 *피안彼岸을채우는 사바娑婆의 눈물, 별빛이 씻긴 이슬의 통로다 라싸의 강을 건넌 나비의 길목에 붉은 사리가 쌓인다 19. 08. 15 진정한 해방을 꿈꾸며... *피안彼岸: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경지,깨달음의 사바세계 한국현대작가19.겨울호

시작노트 2019.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