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171

침묵의 보시

침묵의 보시 김영미 소화되지 못한 멧짐승의 오늘이 머루랑 도토리를 낳고 숲을 낳는다 숲을 빠져나온 허기가 파헤친 속을 드러낸 밭은 말이 없다 씨앗 세 개를 심는 것은 새와 벌레들과 나누는 삶이라 산기슭 세 두렁은 그네들 몫이라는 농부 가슴에 하늘이 들어있다 도토리가 영글고 녹두꽃이 진다 낙화는 또 하나의 생을 여는 숭엄한 추락이다 열매를 향한 침묵의 길을 놓는 사랑으로의 아릿한 번짐이다 공중에 태양 하나 켜 놓고 푸른 멍울 태우는 숲이 지게에 얹힌다 농부의 등이 숲을 접는다. 17.10.07 오늘도 산짐승들이 숲을 옮기는 중일 거다. 사람들의 욕심이 저들의 터전을 훼손했기에 요즘 농촌은 하산하는 짐승들과의 전쟁으로 삭막하기도 하다. 자연환경을 파괴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산 밑 세 두렁은 저들의..

시작노트 2017.10.10

남한산성.2

남한산성.2 김영미 어부바하며 살며시 등 내민 숲 들끓는 푸른 신열로 숨차다 연둣빛 검문을 받지 않고는 5월 성문에 이를 수 없다고 꽃 진 자리마다 초록신발들이 자분자분 걸어간다 꽃을 빛나게 하던 조용한 조력의 시간들 그 숭고한 어우름으로 빛을 더하는 남한산성 발걸음이 듬직하다 나뭇잎들이 햇빛 퉁기며 하늘을 닦아 병자(丙子)년 밀서를 꺼내본다 인조의 눈물 삼킨 솔숲 사이로 광해군 등거리 외교가 빛난다 꽃을 받쳐준 줄기와 나무를 곧게 세운 보이지 않는 뿌리처럼 제왕은 신하와 백성들 힘으로 강건하였다는, 꽃과 나무 작은 풀과 이끼 짐승과 인간의 전설로 어우러진 숲을 읽는다 견고한 성곽의 페이지마다 산성을 지킨 조용한 함성이 쏟아진다 민초들 부역의 땀방울로 산그늘 깊어지는 남한산성 발걸음이 든든하다 17.4...

시작노트 2017.04.27

옥탑방 연가

옥탑 방 연가 김영미 여름이 매미가 머물던 간이역이었다면 옥탑방은 별들이 잠들다간 여인숙이다 구애의 노래로 달궈진 옥탑방은 또 다른 별이 퇴근해 지친 몸을 뉘던 곳, 미루나무 꼭대기처럼 가파른 계단을 내려올 때면 매미소리가 가쁜 숨을 식혀주곤 했다 핏빛 노을을 바라보며 ‘태양이 살해되었다’가 맞다고 투덜대던 옥탑방엔 새벽이면 햇귀가 먼저와 창문을 두드린다 허물을 벗는다는 건 새로운 세계를 얻는 것이다 나무둥치에 발톱을 박고 있는 매미껍질, 울음 가득한 그곳에서 사랑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참 싱그러운 서곡이었다. 억겁의 어둠을 벗어놓은 껍데기 그 빈방은 한여름의 노래로 그득하다 옥탑방 지붕이 별을 품은 하늘과 맞닿아 있다 푸른 날개 펼치는 창들이 싱그럽게 빛난다 2016.10.14 단풍든 나무둥치에 매미껍질..

시작노트 2016.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