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171

식물기의 저녁/ 김영미

식물기의 저녁/ 김영미 전철역 입구 몇 단의 열무가 시들하다 퇴근의 발길들이 눈치채기 어려운 구석진 기다림의 한 켠을 후줄근, 포개어 있다 겉이 시들수록 겨우 기력을 되찾은 안쪽을 뒤적여 또 다른 기다림을 물끄러미 넘겨다 본다 아직 푸른물이 들지 않은 하이힐과 구부러진 욕망 저쪽에서 걸어온 듯한 사내들의 뒷굽 소리가 봄날의 마지막 꿍꿍이라도 찾는 듯한 저녁의 입구를 노파 하나 기다림을 질끈 포개어 앉아있다 기다린다는 건 기다리지 못한 것들의 마지막 기회 소금을 뿌려야 비로소 파랗게 깨어날 지상 한 켠의 꿈 같은 것 갑자기 골목 어디선가 소낙비가 뛰쳐나왔고 한순간 뿔뿔이 흩어지는 도시의 환영들 소낙비가 그치고 지쳐있던 노파의 함지박이 생기를 되찾자 성급한 자동차 불빛들 먼저 도시 한 켠 마지막 기다림을 빠..

시작노트 2022.03.01

입춘

입춘/ 김영미 이제 겨울은 기소중지 되었다 베란다 밖 소문들은 자코메티의 조형처럼 길어지기 시작했고 누군가 실려 온 이삿짐에는 별거라는 딱지가 붙어있었다 선인장 속 사막이 꽃이 되려면 두 마리의 낙타가 필요할지도 몰라 바코드를 찍을 때마다 나의 신분이 미행당하는 듯한 그 짧은 느낌은 햇살들의 과소비일까 아니면 나만의 조급증일까 어쩌면 봄은 기소되지 못할지도 몰라 한때 나는 먼 시간 저쪽의 소문들을 찾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만난 적 있었다 바다를 넘었고 *작은 섬에 이르러 지문이 아니고는 읽어낼 수 없는 화석의 시간을 짐작하곤 했다 미래로 돌아가는 일은 시간의 풍랑을 만나는 일이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내 안의 권태를 버린다는 것 봄날은 더디 갈 것이다 마루 속 10년 전의 표정도 영정이라는 계절 속에서 ..

시작노트 2022.02.14

세월/ 김영미

세월의 무게/김영미 돌멩이 하나가 물 속에서 제자리를 지키려면 이끼를 끌어안아야 할 푸른 은신의 시간이 필요하다 모두가 아우성치며 저쪽 세월이 광장이라고 고집하던 것은 잊은 채 내 안의 침묵, 그 무게가 더 깊은 망각을 부르는 날까지 버텨야 한다 모든 침묵은 바다로 가는 외길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가는 항변이라는 것 때론 더 깊은 망각의 안쪽을 지켜야 한다고 더 푸른 이끼의 시간을 덮고 있어야 한다고 곧은 무게의 다짐을 곱씹는 사이 거리의 나무들은 제 계절을 바꿔 입거나 도서관으로 향하는 붉은 벽돌의 모퉁이를 떠돌고 있겠지 뿌리라는 것 해마다 봄의 증거라도 끌어모으듯 나이테 하나씩 얻는다는 것, 이미 먼 길을 왔다는 건 무성한 방황 속에 제 고향을 두었다는 것 나는 오늘도 거리의 지식들이 분주히 떠도는 ..

시작노트 2022.02.14

구름이 쓰는 서사시/ 김영미

구름이 쓰는 서사시/ 김영미 유월은 새들의 소리조차 귀를 닫는다 구름의 거처에서 쓰다 만 편지지를 며칠이고 고민하거나 바깥, 비가 오지 않을 날들을 헤아리면서 햇살의 눈이 머는 일이다 그럴 때마다 가끔씩 숲을 헤매거나 나무들의 안부를 묻는 일이 습관이 되기 시작했다 버섯들의 후미진 이동과 산새라고 얘기했던, 아! 그것들은 유월의 가족이 아니라 여름의 군락이었음을 나는 기억한다 한때 나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몇 무리의 계절과 나무들 그 쓰디쓴 틈바구니에서 내가 가족을 만난 적 있었다 씀바귀가 더 쓰디쓴 이유는 셋째가 지난밤 꿈을 잘못 꾼 탓일 거야 나무들은 서로 다투어 숲을 빠져 나갔고 등잔이 켜있던 내 기억의 마지막 방점이 머물던 자리, 그 아름다운 계절을 다시는 내 힘으로 초대할 수 없음을 나는, 안다 ..

시작노트 2022.01.25

12월의 세례

12월의 세례/ 김영미 한낮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햇살이 좁아지고 며칠 미열로 버티던 감기의 행방이 기관지 속으로 쏠린다 가을 한때 회상에 묻어두었던 릴케의 시집이 마지막 페이지로 몰리고 내 건조한 취미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플라스틱 시루 속 콩나물들이 푸른 음표의 영역을 줄여간다 틈새로 새어들던 물세례와 그때마다 검은 보자기 너머로 쏟아지던 12월의 햇살들, 그랬었구나 저 음표들이 검은천 속에서 그늘진 날들을 보내지 않으면 허튼 날개가 되어 탄식의 깊은 구렁텅이로 빠질 것이니 한낮의 콩나물들은 양날의 검이 되어 어둠과 빛의 경계를 넘어오거나 직립의 날들을 견뎌야 한다 와르르, 또 다른 물들의 뭇매가 몰려오기 시작했고 나는 그 어둠의 음표들을 무엇으로도 덮어줄 수 없어 창가로 가 봄날의 햇살들을 단속하기 ..

시작노트 2021.12.13

기억의 무게

기억의 무게 /김영미 나무가 제 무게를 내려놓는다 여름내 눅눅한 상념을 뒤적이던 잎들과 긴 오후를 지탱해주던 몇 줌의 바람을 아무런 미련없이, 뒤돌아보면 늦가을 나무들은 어머니를 닮아 있다 그렇다면 햇살을 따라나선 지상의 자식들은 태양의 영토 어디쯤에서 제 이름을 밝히고 있을까 온전하다고 믿던 내 사랑은 미수에 그치고 그리움은 고장난 시계바늘처럼 침묵한다 어쩜 이곳 어디쯤은 아니었을까 햇살을 받아내며 덜 익은 열매의 불안조차 잠재우는 숲, 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었지 바람처럼 자유로워져서도 너무 달콤한 열매를 꿈꿔서도 안 된다고 그런 날이면 내 기억의 맨 뒤켠에서 무화과 열매를 익히거나 몇 모금의 햇살을 종교처럼 받아내던 어머니 어디선가 서풍이 불어왔고 나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양파 하나 꺼내어 서둘..

시작노트 2021.10.11

봉화

봉화 / 김영미 밤하늘 별빛을 들이키며 어둠의 귀퉁이를 갉아대는 봄날의 개구리 소리를 닫아버린 아파트 37층에서 바라본 그는 명왕성에서도 보인다는 담배 불빛으로 존재를 점멸하는 중이다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삶의 지표가 내뿜은 연기처럼 부풀던 바람의 흔적을 지우는, 더는 삼킬 수 없어 절망을 내뱉는 중이리라 보이지 않아 허물 수도 없는 벽 그 벽에 붙은 뉴스에선 바이러스 덫에 걸린 수치와 높은 대출금리가 둥둥 떠다니고 흡연 공간처럼 귀퉁이로 내몰린 그는 명왕성을 향해 신호를 보낸다. 콘크리트 벽에선 화석이 된 개구리가 별빛을 토해내며 담배 불빛에 실려 봉화대에 오른다 21.08.29 현대작가.21겨울

시작노트 2021.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