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기의 저녁/ 김영미 전철역 입구 몇 단의 열무가 시들하다 퇴근의 발길들이 눈치채기 어려운 구석진 기다림의 한 켠을 후줄근, 포개어 있다 겉이 시들수록 겨우 기력을 되찾은 안쪽을 뒤적여 또 다른 기다림을 물끄러미 넘겨다 본다 아직 푸른물이 들지 않은 하이힐과 구부러진 욕망 저쪽에서 걸어온 듯한 사내들의 뒷굽 소리가 봄날의 마지막 꿍꿍이라도 찾는 듯한 저녁의 입구를 노파 하나 기다림을 질끈 포개어 앉아있다 기다린다는 건 기다리지 못한 것들의 마지막 기회 소금을 뿌려야 비로소 파랗게 깨어날 지상 한 켠의 꿈 같은 것 갑자기 골목 어디선가 소낙비가 뛰쳐나왔고 한순간 뿔뿔이 흩어지는 도시의 환영들 소낙비가 그치고 지쳐있던 노파의 함지박이 생기를 되찾자 성급한 자동차 불빛들 먼저 도시 한 켠 마지막 기다림을 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