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입춘

언어의 조각사 2022. 2. 14. 23:13

입춘/ 김영미

 

이제 겨울은 기소중지 되었다

베란다 밖 소문들은

자코메티의 조형처럼 길어지기 시작했고

누군가 실려 온 이삿짐에는

별거라는 딱지가 붙어있었다

선인장 속 사막이 꽃이 되려면

두 마리의 낙타가 필요할지도 몰라

바코드를 찍을 때마다

나의 신분이 미행당하는 듯한

그 짧은 느낌은 햇살들의 과소비일까

아니면 나만의 조급증일까

어쩌면 봄은 기소되지 못할지도 몰라

한때 나는

먼 시간 저쪽의 소문들을 찾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만난 적 있었다

바다를 넘었고 *작은 섬에 이르러

지문이 아니고는 읽어낼 수 없는

화석의 시간을 짐작하곤 했다

미래로 돌아가는 일은

시간의 풍랑을 만나는 일이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내 안의 권태를 버린다는 것

봄날은 더디 갈 것이다

마루 속 10년 전의 표정도

영정이라는 계절 속에서

가을을 더디 찾아낼 것이다

발을 헛디딜 때마다

제자리를 찾는 과거의 사연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시월의 행방을 햇살 너머로 넘겨본다

 

 

*작은 섬:강화도 선원사

문학청춘2022가을호, 2024미당문학, 시와수상문학동인지

메모-

미량의 햇살에 떠밀려 빙하의 계절이 열반에 들 즈음

소문의 지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집안 가득히 봄을 저장하던 난방 보일러를 끄고

햇살 속 푸른 씨앗의 길을 바라보며 창문을 연다.

그 순간 화르륵 내안에 들어서는 봄, 봄,봄...~^^

 

 

'시작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빈센트반고흐]밤하늘은 깨진 파일이다  (0) 2022.04.27
식물기의 저녁/ 김영미  (0) 2022.03.01
세월/ 김영미  (0) 2022.02.14
구름이 쓰는 서사시/ 김영미  (0) 2022.01.25
그늘의 시간을 보다 /김영미  (0) 2021.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