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식물기의 저녁/ 김영미

언어의 조각사 2022. 3. 1. 10:48

식물기의 저녁/ 김영미

 

전철역 입구

몇 단의 열무가 시들하다

퇴근의 발길들이 눈치채기 어려운

구석진 기다림의 한 켠을 후줄근, 포개어 있다

겉이 시들수록 겨우 기력을 되찾은 안쪽을 뒤적여

또 다른 기다림을 물끄러미 넘겨다 본다

아직 푸른물이 들지 않은 하이힐과

구부러진 욕망 저쪽에서 걸어온 듯한 사내들의 뒷굽 소리가

봄날의 마지막 꿍꿍이라도 찾는 듯한 저녁의 입구를

노파 하나 기다림을 질끈 포개어 앉아있다

기다린다는 건 기다리지 못한 것들의 마지막 기회

소금을 뿌려야 비로소 파랗게 깨어날

지상 한 켠의 꿈 같은 것

갑자기 골목 어디선가 소낙비가 뛰쳐나왔고

한순간 뿔뿔이 흩어지는 도시의 환영들

소낙비가 그치고

지쳐있던 노파의 함지박이 생기를 되찾자

성급한 자동차 불빛들 먼저

도시 한 켠 마지막 기다림을 빠르게 지우며 사라진다.

 

광주문학25호

착각의시학22가을호

 

메모-- 소낙비가 내리면 뒷굽들은 후다닥 뿔뿔이 흩어진다

비가 그치면 노파의 풍경을 지우며 빠르게 모이곤 하던,

열무가 몇 모금의 생기를 되찾자 노파의 기다림은 시들시들 초조해지고

뒷굽들은 무심히 빠르게 지나친다.

구름의 거처에서 비가 될 사연을 들쓰고 있는 기다림만 시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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