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구름이 쓰는 서사시/ 김영미

언어의 조각사 2022. 1. 25. 21:49

구름이 쓰는 서사시/ 김영미

 

유월은 새들의 소리조차 귀를 닫는다

구름의 거처에서 쓰다 만 편지지를

며칠이고 고민하거나

바깥, 비가 오지 않을 날들을 헤아리면서

햇살의 눈이 머는 일이다

그럴 때마다 가끔씩 숲을 헤매거나

나무들의 안부를 묻는 일이 습관이 되기 시작했다

버섯들의 후미진 이동과 산새라고 얘기했던,

아! 그것들은 유월의 가족이 아니라

여름의 군락이었음을 나는 기억한다

한때 나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몇 무리의 계절과 나무들

그 쓰디쓴 틈바구니에서 내가

가족을 만난 적 있었다

씀바귀가 더 쓰디쓴 이유는

셋째가 지난밤 꿈을 잘못 꾼 탓일 거야

나무들은 서로 다투어 숲을 빠져 나갔고

등잔이 켜있던

내 기억의 마지막 방점이 머물던 자리,

그 아름다운 계절을

다시는 내 힘으로 초대할 수 없음을 나는, 안다

계절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나무와 내 아름다웠던 가족들도

숲의 나무로 우뚝 설 것이다

그곳에 내가 있었던가

조용히 과거들을 끌어모아

내 한 뼘의 도시로 걸음을 옮긴다

 

광주문학 25호

메모: 장마는 구름이 쓰는 거대한 서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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