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12월의 세례

언어의 조각사 2021. 12. 13. 22:40

12월의 세례/ 김영미

 

 

한낮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햇살이 좁아지고

며칠 미열로 버티던 감기의 행방이

기관지 속으로 쏠린다

가을 한때

회상에 묻어두었던 릴케의 시집이

마지막 페이지로 몰리고

내 건조한 취미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플라스틱 시루 속 콩나물들이

푸른 음표의 영역을 줄여간다

틈새로 새어들던 물세례와

그때마다 검은 보자기 너머로 쏟아지던

12월의 햇살들,

그랬었구나

저 음표들이 검은천 속에서

그늘진 날들을 보내지 않으면

허튼 날개가 되어

탄식의 깊은 구렁텅이로 빠질 것이니

한낮의 콩나물들은 양날의 검이 되어

어둠과 빛의 경계를 넘어오거나

직립의 날들을 견뎌야 한다

와르르,

또 다른 물들의 뭇매가 몰려오기 시작했고

나는 그 어둠의 음표들을 무엇으로도 덮어줄 수 없어

창가로 가 봄날의 햇살들을 단속하기 시작한다

 

미당문학14호

시와수상문학22.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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