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세월/ 김영미

언어의 조각사 2022. 2. 14. 22:58

세월의 무게/김영미

 

 

돌멩이 하나가 물 속에서 제자리를 지키려면

이끼를 끌어안아야 할 푸른 은신의 시간이 필요하다

모두가 아우성치며

저쪽 세월이 광장이라고 고집하던 것은 잊은 채

내 안의 침묵,

그 무게가 더 깊은 망각을 부르는 날까지 버텨야 한다

모든 침묵은 바다로 가는 외길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가는 항변이라는 것

때론 더 깊은 망각의 안쪽을 지켜야 한다고

더 푸른 이끼의 시간을 덮고 있어야 한다고

곧은 무게의 다짐을 곱씹는 사이

거리의 나무들은 제 계절을 바꿔 입거나

도서관으로 향하는 붉은 벽돌의 모퉁이를 떠돌고 있겠지

뿌리라는 것

해마다 봄의 증거라도 끌어모으듯 나이테 하나씩 얻는다는 것,

이미 먼 길을 왔다는 건 무성한 방황 속에

제 고향을 두었다는 것

나는 오늘도 거리의 지식들이 분주히 떠도는 오후 속으로 나선다

책 속 낯선 문장들을 허물거나

휴식의 모퉁이를 돌아 커피를 마신다

누군가로부터 잘못 걸려온 전화를 용서하거나

창밖 또 다른 강을 낼 듯 무모하게 떠도는 구름들을 본다

작은 대합실을 지나며

누군가 부주의하게 쓴 고향이라는 낯선 행방을

물끄러미 넘겨다보기도 하는 오후 속의 나날들,

그런 날 나는

오래 미뤄두었던 거울 속으로 돌아와

아직 한 번도 지어보지 못한 미소들의 순서를

다시금 짚어본다

 

2010.06.03에 쓴 글을 개작하다

-계간시마을문예 23

-한국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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