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무게/김영미
돌멩이 하나가 물 속에서 제자리를 지키려면
이끼를 끌어안아야 할 푸른 은신의 시간이 필요하다
모두가 아우성치며
저쪽 세월이 광장이라고 고집하던 것은 잊은 채
내 안의 침묵,
그 무게가 더 깊은 망각을 부르는 날까지 버텨야 한다
모든 침묵은 바다로 가는 외길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가는 항변이라는 것
때론 더 깊은 망각의 안쪽을 지켜야 한다고
더 푸른 이끼의 시간을 덮고 있어야 한다고
곧은 무게의 다짐을 곱씹는 사이
거리의 나무들은 제 계절을 바꿔 입거나
도서관으로 향하는 붉은 벽돌의 모퉁이를 떠돌고 있겠지
뿌리라는 것
해마다 봄의 증거라도 끌어모으듯 나이테 하나씩 얻는다는 것,
이미 먼 길을 왔다는 건 무성한 방황 속에
제 고향을 두었다는 것
나는 오늘도 거리의 지식들이 분주히 떠도는 오후 속으로 나선다
책 속 낯선 문장들을 허물거나
휴식의 모퉁이를 돌아 커피를 마신다
누군가로부터 잘못 걸려온 전화를 용서하거나
창밖 또 다른 강을 낼 듯 무모하게 떠도는 구름들을 본다
작은 대합실을 지나며
누군가 부주의하게 쓴 고향이라는 낯선 행방을
물끄러미 넘겨다보기도 하는 오후 속의 나날들,
그런 날 나는
오래 미뤄두었던 거울 속으로 돌아와
아직 한 번도 지어보지 못한 미소들의 순서를
다시금 짚어본다
2010.06.03에 쓴 글을 개작하다
-계간시마을문예 23호
-한국현대문학
'시작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식물기의 저녁/ 김영미 (0) | 2022.03.01 |
---|---|
입춘 (0) | 2022.02.14 |
구름이 쓰는 서사시/ 김영미 (0) | 2022.01.25 |
그늘의 시간을 보다 /김영미 (0) | 2021.12.23 |
12월의 세례 (0) | 2021.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