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 576

해묵음에 대하여 / 박경원

해묵음에 대하여 / 박경원 원래의 길이 지워진 녹슨 나사를 풀다가 나는 보았다, 녹이 벗겨지고 잇몸만 남은 수나사에 비해 아직은 생생히 남아 있는 암나사의 해묵은 틈, 이가 주저앉은 자리마다 세월의 꽃이 피어 원래의 청춘을 버리고 그리움의 뒤안길로 견뎌온 우리들의 녹슨 골목길도 함께 보인다. 빠진 못자리처럼 녹슬고 지친 눈빛을 닦으며 돌아오는 길 나무 아래 작은 벌레들의 울음에도 헐거운 발길을 곧추세우는, 평생 샛길 한번 내지 못한 골목과 골목 사이 우리들의 작은 풍경. 문패가 바뀌고 늦은 귀가의 흐느적한 노랫소리 지워졌어도 그쯤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텅 빈 정적을 흔들어 깨우는 습관의 해묵은 자리는 깊은 밤 떠난 사람 아닌 우리들의 몫이다. 밤새 서성이던 골목도 잠들어 이제는 눈 좀 붙여야지, 하며 혼자..

오이도/ 이효숙

오이도 이효숙 1 섬의 뿌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멀미를 겨워하던 이웃들은 하나씩 짐을 구렸다. 비워낸 자궁처럼 더 이상 불빛이 보이지 않는 빈 집의 문들은 어둠 속에서 저 혼자 펄럭이고 허기진 별들은 버려진 그물더미를 갉아 먹으며 궁색한 밤을 비워내고 있었다. 아무와도 약속하지 않았던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새벽의 근처에서 싸늘한 바다를 물어뜯던 까마귀 떼. 죽음 몇 뿌리 헹궈내던 그 바다에서 양식(糧食)처럼 자라나던 굴들의 여린 살과 해초의 푸른 머리칼로 밥상 위를 가늠하던 아, 아 지금은 울부짖다 목이 쉰 침묵의 섬. 바다 위로 우우 몰려가며 가래 끓던 바람 소리도 아주 가버리거나 절벽 아래서 검붉게 피멍든 채로 누워 버렸는지 사방은 허물어진 소문과 플라스틱 문패 속에 버려진 이름들이 나뒹..

부의/최영규

부의/최영규 봉투를 꺼내어 부의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웅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세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 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랏빛으로 싱싱해졌다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배나 큰 꽃들을 여름내 계속 피워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 반짝이는 껍질의 씨앗 속으로 숨어들고 또다시 꽃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숨쉬는 듯 건강해 보였다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알이 반짝이며 입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따듯한 국/박경원

따듯한 국/박경원 혼자 깨어난 집 안, 화장실로 향하기 전 나는 책이 꽂힌 벽을 한 바퀴 훑으며 눈곱처럼 딱딱한 제목들을 턴다 싱크대에 다가가 먼저 비우고 떠난 시간들을 살핀다 내가 비우고 채워 넣을 여분의 영역과 설거지들의 수위 아직도 식욕을 기억하는 듯 느리게 떠다니고 있는 반찬 부스러기의 종류를 들여다본다 국으로 짐작되는 솥에 손을 얹고서 외출의 거리를 살핀다 안심이다. 따듯한 그녀 아직은 멀리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떠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부리나케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 내가 다시금 조용한 잠으로 가라앉아 있을 싱겁지도 짜지도 않은 집 안에 일요일 한 시 쯤의 바깥 풍경을 방금 버무린 냉이무침과 함께 차려놓을 것이다 왼쪽 옆구리로 몰린 잠을 뒤척, 반대편으로 옮긴다

신발론(論)/ 마경덕

신발론(論)/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 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신발은 인간 존재 자체이다. 신발을 신고 살아야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 온 삶의 흔적을 한 장의 종이에다 기록하고 이것을 이력서(履歷書)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그렇다. 실재로 이력서라는 말의 한문을 풀어보면, ..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글을 쓰면서 혼자만의 저장공간이 필요해서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 깜박 잊고 잠금 없이 글을 올렸는데, 그곳에 댓글을 남기고 가신 분들... 그 인연으로 아름다운 분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만남은 없어도 글을 통해 공감하고 소통하면서 참 행복합니다. 2022년에도 아름다운 인연으로 이어지길 바라며 이곳을 다녀가신 모든 벗님이 늘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룹명/사랑방 2021.12.30

2022년도 신춘문예 당선작

목다보/ 송하담 아버지는 목수였다 팔뚝의 물관이 부풀어 오를 때마다 나무는 해저를 걷던 뿌리를 생각했다. 말수 적은 아버지가 나무에 박히고 있었다. 나무와 나는 수많은 못질의 향방을 읽는다 콘크리트에 박히는 못의 환희를 떠올리면 불의 나라가 근처였다. 쇠못은 고달픈 공성의 날들. 당신의 여정을 기억한다. 아버지 못은 나무못. 나무의 빈 곳을 나무로 채우는 일은 어린 내게 시시해 보였다. 뭉툭한 모서리가 버려진 나무들을 데려와 숲이 되었다. 당신은 나무의 깊은 풍경으로 걸어갔다. 내 콧수염이 무성해질 때까지 숲도 그렇게 무성해졌다. 누군가의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박히는 게 아니라 채우는 것. 빈 곳은 신의 거처였고 나의 씨앗이었다. 그는 한 손만으로 신을 옮기는 사람 나무는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않..

2021년 문학포럼, 문학상, 한국문인육필걸작선<활어>출판기념회

[투데이안] 계간 종합문예지 '착각의 시학 (대표 김경수 – 연출 이늦닢)이 주관하고 한국착각의시학 작가회가 후원하는 2021년 문학상, 신인문학상, 제16호 사화집 한국문인육필걸작선 '活語' 출판 기념회가 지난 27일 서울 강북구 문화예술회관에서 장수현 기획위원장 사회로 열렸다. 이날 행사는 김경수 발행인 인사 말씀과 김년균 전) 한국문협 이사장의 축사, 방지원 김기림문학상 운영위원장, 정정호 국제펜 한국본부 번역원장의 격려사와 김영미시인의 ‘착각의 시학 서시 낭송’ 등 순으로 진행됐다. 수상자는 제8회 김기림문학상 대상에 허형만(수상집 '있으라 하신자리에') 본상에 김계영(수상집 '흰 공작새 무희가 되가' 시인이 각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제16회 한국창작문학상 대상에는 이병연 시인(수상작 '적막은..

그룹명/사랑방 2021.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