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문학의 향기(공부방)

2022년도 신춘문예 당선작

언어의 조각사 2021. 11. 29. 22:51

목다보/ 송하담

아버지는 목수였다

팔뚝의 물관이 부풀어 오를 때마다 나무는 해저를 걷던 뿌리를 생각했다. 말수 적은 아버지가 나무에 박히고 있었다.

나무와 나는

수많은 못질의 향방을 읽는다

콘크리트에 박히는 못의 환희를 떠올리면 불의 나라가 근처였다. 쇠못은 고달픈 공성의 날들. 당신의 여정을 기억한다. 아버지 못은 나무못. 나무의 빈 곳을 나무로 채우는 일은 어린 내게 시시해 보였다. 뭉툭한 모서리가 버려진 나무들을 데려와 숲이 되었다. 당신은 나무의 깊은 풍경으로 걸어갔다. 내 콧수염이 무성해질 때까지 숲도 그렇게 무성해졌다. 누군가의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박히는 게 아니라 채우는 것. 빈 곳은 신의 거처였고 나의 씨앗이었다.

그는 한 손만으로 신을 옮기는 사람

나무는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당신에겐 노동은 어려운 말. 그의 일은 산책처럼 낮은 곳의 이야기였다. 숲과 숲 사이 빈 곳을 채우기 위해 걷고 걸었다.

신은 죽어 나무에 깃들고

아버지는 죽어 신이 되었다

나무가 햇살을 키우고

나는 매일 신의 술어를 읽는다

목어처럼 해저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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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슈퍼/고선경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매일 걷는 골목을 걸어도 여행자가 된 기분인데요
아차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바람이 불고 머리 위에서 열매가 쏟아집니다
이게 다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 말이죠
씹던 껌을 껌 종이로 감싸도 새것은 되지 않습니다
자판기 아래 동전처럼 납작해지겠지요 그렇다고
땅 파면 나오겠습니까?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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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박수봉

 

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접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촘조촘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 중이다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다문 대문을 빈집은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어 밀어 보지만
끝내 대문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당 깊은 곳까지 어둠이 차오르면 빈집은
눈을 들어 별자리를 더듬는다
식구들이 몰려 간 서남쪽 하늘
별이 기울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들쥐가
들어앉아 새끼를 낳았다
이따금 달빛이 새끼들의 털을 핥아주고 갔다
들쥐는 빈집의 뒷다리를 갉아 먹으며 자라고
집은 제자리에서 우물처럼 늙어간다
빈집의 늑막 아래로 어둠이 점점 차오른다

[202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확정
출처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http://www.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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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록체에 대한 기억/ 이경주

 

숲을 떠난 푸른빛의 기억이 갇힌 방으로 들어간다

형광등 불에 달궈진 자갈과 모래알들이 바닥에 깔리어

전갈이 지나는 길을 만들고 있다

마른 바람이 눈에 익거나 때로는 낯선 발자국들을 지우는 한낮에는

미세한 먹이사슬들이 잠깐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얗다

종일 내리쬐는 빛은 벽에 박힌 나무들의 뿌리와

그걸 바라보는 죽은 새들의 밥상과

좁은 틈새를 뚫고 머리를 든 작은 벌레들의

핏줄까지 하얗게 만든다

한번이라도 불빛에 닿은 것들은 제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오후가 저물 때면 변색의 관성은 더욱 강해져

누구도 아침을 기억하지 못한다

방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다

아무렇게 발을 들여 놓았다가

깊은 사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풍에 갇히어 돌아설 수 없다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표정이라고는 창백한 빛뿐인 고요한 방이

암흑 속을 빠르게 날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다 분명 하루가 지난 거 같은데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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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 / 신춘희

눈사람 한쪽 눈이 삐뚤게 붙어 있다
돌멩이 하나 머금었다

지금 조금씩 녹고 있는데
눈두덩이가 시릴 만큼 너를 오래 붙잡고 싶어
미안하지만 나는 점점 온기를 갖고
안타깝지만 너는 점점 부피를 줄이고
한동안 우린 밀착된 결빙으로 중력을 버티지
눈송이들 모여 숨겨둔 방
이곳은 해의 꼬리가 닿지 않아 심장을 두기 좋지
두근대는 돌멩이가 감정이라면
겨울은 안전한 밀실이야
사람들은 그저 눈빛을 얹어주거나
손끝으로 훑어볼 뿐
녹아내려야 하는 운명엔 관심이 없지
내가 너를 지키는 방법은
구름을 불러 모으는 일
눈이 자꾸 짓물러지고 있어
눈 속에 갇힌 마음이 죄다 흘러내리고 있어
우리가 견뎌야 했던 것들을 생각해
처음 눈덩이 궁글렸을 때의 설렘 같은 거
아이들 모두 돌아간 뒤 입꼬리를 움직여본 거
별들이 싱싱해서 우리는 하나였던 거야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낮이야
돌멩이와 눈덩이가 분별되어야 하는 시간이야
마지막 냉기가 사라지면
너는 나를 놓아줄 테지
그때까지 나는 너의 공중이 될 거야
머리가 기울고 있어
몸에 금이 가고 있어
물의 장례가 시작되고 있어

툭, 돌멩이 하나 그렁그렁 쏟아져 내린다
출처 : 경상일보(http://www.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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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당선작

고요를 찾다/ 김종숙

 

 

요동치던 밥솥에 뜸이 들고
솥뚜껑을 열면 거기
너무도 고요해진, 반듯한 밥알들

끓어 넘치고 치솟던 설익은 시간이 지나고
잦아든 잘 지어진 밥

까칠한 쌀알들이
반지르르한 한솥밥이 되기까지
가령, 몇억 년 동안 쌓인 사막의 무늬들이나
물에 씻긴 돌의 생김새 같은
저의 격렬을 저도 종잡지 못한 일을
따라 했을 뿐이다

또는, 반듯한 간격을 맞추어
파랗게 자란 벼포기들이
탈곡이 되고 같은 자루에 동량으로 담기는 동안
바르르 떨다 잠잠해진 저울의 바늘이 함께 들어 있어
더도 덜도 없는 정량,
들쭉날쭉 흐트러진 적이 없다

흔들릴 만큼 흔들린 벼 포기들
털릴 만큼 털려 본 낟알들

갈 만큼 다 걸어가 보고야
능숙하게 제 길을 가거나 돌아오는 답습처럼
그 뒤끝은 저렇게
결 고른 한솥밥이 되는 것이다

이쪽도 넘보고 저쪽도 넘보던
휘청이며 허기진 몸이 그 고요해진 밥을 먹고
제힘을 힘껏 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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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유인력/ 양승수

 

한 알의 사과가 저문다

잘 여문 것 좇아 줄기와 가지 따라

억지로 삼키던 몇 모금의 물 따라

바쁘게 걸어온 길에서 폴짝 뛰어오른다

느껴지지 않던 중력이 어느 순간 무거워져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날아오르는 것이다

떨어질 때가 된 사과는 서서히 붉어지는 것이고

떨어지고 난 사과가 여전히 싱싱한 것은

사라지지 않은 관성, 따르다 남은 습관 탓이다

사과의 단맛은 그런 식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과를 가졌을까

하루에도 몇 개의 사과가 공중으로 날아오를까

저로부터 최대한 멀리 뻗어

그러나 고작 몇 발자국 사과를 배웅 나갔다가

휘어졌던 가지가 그 탄력으로

복원되는 궤적을 그리며 돌아온다

돌아오는 가지 하나 횡단보도를 건넌다

걸음 재촉하는 신호등

가던 길 멈추고 고개 돌려 옆을 보았다면

중력이 늘 같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거나

받아들이거나

도로에는 각자 서로 다른 중력으로 달려온 것들

잠시 멈추어 서 있다

그러나 멈추었다는 것을 아는 자동차는 없다

아무도 시동을 끄지 않는다

떨어진 낙과의 단맛 같은 엔진소리

정지선에 닿기 전 이 곳은 공중이다

바람이 지나온 커브길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뻗어나간 잎맥의 갈림길 따라

빨아들인 햇빛 같은 후회

꽃 피었다가 졌던 시간 흘러가지 않고 멈춰

오래 서성이던 발자국이었다가

흘러갈 곳 없는 소리들 엉켜있던 것이라 한들

사과를 두고 무슨 오해라 할까

[무등일보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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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당선작

숲에살롱/ 최은우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 말이 생깁니다 기분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기분 탓인가요? 그러자고 한 건 아닌데 수다장이가 돼서 오물조물 오래 씹어 쉴 새 없이 꺼냈어요 이야기라면 해도 해도 할 게 많아요 귀를 여는 자가 없다면 저 무성한 나뭇잎들이 있잖아요 이리 와서 들어봐요 늘 같은 이야기지만 오늘은 하나 더 추가시킬 예정이에요 극적인 요소는 늘 있어요 마녀들이 밤에 모여 항아리에 대고 떠들던 주문 같은 것도 있다니까요 인생은 재미 아니겠어요? 문밖 무성한 화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야길 엿듣고 흉내 내느라 줄거리가 아니 줄기가 생겨서 풍성해졌어요 염치도 없이 나무 옆에 나무를 낳네요 자꾸만 나무들이 생기는 오후에 하나 더 있다고 하나 더 없다고 나무가 나무 아닌 것은 아니겠지요 비 오는 오후에도 어김없이 이야기에 중독된 여자들이 똑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감수분열하듯 옆에서 옆으로 다음 손님을 부르네요

여자는 거미 다리 같은 손가락으로 사뿐사뿐 머리카락을 잘라요 몸이 생기기 전부터 손가락만 있었던 것처럼 손은 여자를 떠나 가위를 들고 허공에서 춤을 춰요 원피스에서 요란하게 싸우고 있던 꽃무늬들이 살짝 얼굴을 빼자 잎사귀들이 떨어져요 떨어져서 허공으로 떠다니는 꽃들. 차를 마시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요 알지 못해요 가위질 소리에 맞춰 간간이 웃음소리를 끼워 넣을 뿐. 유리문이 밀릴 때마다 들어오세요 붙여진 팻말에서 글자들이 살짝 떨어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서죠 비밀과 상처는 오늘은 괜찮고 내일은 거대해지다 모레면 잊고 글피엔 주저앉게 만드니까요 쉽게 묻는 게 좋을까요 쉽게 말하는 게 좋을까요 수다장이들이 수다스럽게 찻잔을 부딪치며 그런 건 관심 없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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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여울음/ 이선악
 
슬픈 시를 쓰려고 배고프다, 썼는데 배곺으다라 써졌다
곺 뒤에 커서를 놓고 백스페이스키를 누르자 정말 배가 고팠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버렸나? 배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고프다, 쓰자 배가 없어졌다. 등이 구부러지는, 굴절된 뼈 같은 오후

그래, 슬픔은 늘 고프지
어딘가가 고파지면 소리 내어 울자, 종이 위에 옮겼다

세면대 위에 틀니를 내려놓듯 덜컥, 울음 한마디 내려놓고 왔습니다
그뿐인가 했더니
옆구리 어디쯤에 쭈그리고 있던 마음, 굴절되어 있네요

거품을 집어삼킵니다 씹어도 건더기라곤 없는 튀밥
혓바닥이 마르고, 버썩거립니다

그래요, 뭐든 버썩거릴 때가 있어요 잠깐 눈 돌리면
쏟아지기도 하고…

난 수년 전 아이 몇몇 쏟아버린 적도 있어요

그땐 내 몸도 깡그리 쏟아졌던 것 같아요 마지막 손톱을 파낼 땐
눈에도 금이 가고 있었죠

‘얘야, 눈빛이 많이 말랐구나 눈을 새뜨고 있는 게 아니었어’ 내가,

‘손가락을 흘리고 다니지 말랬잖아요 근데 왜 까마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지…’ 보송보송 털이 난 꿈속에서

배가 고프단 얘긴 줄 알았는데, 그림자 얘기였어

부품해진 그림자론 날아오를 수 없다, 어떤 돌은 그림자도 생겨나지 않는다, 죽은 후론 배꼽도 떠오르지 않는다, 쏟아졌던 아이들이

처음으로 수면에 떠올라
‘배꼽은 어디 있을까?’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깨지지 않는 것도 깨진 것이 돼 버린 오후
이렇게 비좁고, 나는 깎아지른 맘뿐이었나

몇 줄 적지 못한 종이 한 장 찢어, 공중에 날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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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스페인 / 이신율리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지 죽음에도 삶에도

수세미를 뜬다 사과를 뜬다
코바늘에 걸리는 손거스러미가 환기하고 가는 날씨
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들 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 삼아 한판
사과나무에서 다닥다닥 열린 복숭아를 다퉈도 되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에서 속옷과 영양제를 건져 올렸다 첫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

꽃병에 심야버스를 꽂았다 팔다리가 습관적으로 생겨나는 월요일, 아플 때마다 키가 자라는 일은 선물이었다

불꽃이 튀어도 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벨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
 
[세계일보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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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박규현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 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의심이 없을 때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젖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얼어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극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장갑을 끼지 않아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나에게도 손이 있다니 나무들을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메리에게 답장을 씁니다
천사 혹은 기원이 있을 곳으로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밭에 글씨를 써도 잊혀지는 곳으로 우리가 전부여서 서로에게 끌려다니는 곳으로

눅눅한 종이뭉치를 한 움큼 쥐고 있었는데
눈을 뭉쳐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희망해 온 사람

무겁고 불편한 폭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그들의 눈을 빌립니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이가 될 것이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메리,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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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 / 김종태
 
뉴타운 소문을 태우고 마을버스가 들어왔다

미숫가루처럼 흙먼지만 내려놓고 폐교를 한 바퀴 돌더니

제비처럼 고샅길을 빠져나갔다

언젠가부터 절개지 묵정밭엔 어린 의혹들이 심겨지기 시작했다 깨진 항아리 속에 갇혀있던 뻐꾸기 소리에 둔덕 까마중 몇, 복부인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귀고리를 흔든다 전과자인양 담장 안을 기웃거리던 햇살, 굴다리 밑으로 잠입하고 배 밭으로 달려간 그림자 하나가 이른 아침부터 풍선 불 듯 바람의 평수를 후후- 부풀린다

두부장수 확성기에 귀를 열던 도토리들 일제히 상수리나무를 버린다 선거벽보 어지럽게 붙어있는 축대 아래, 사방치기 놀이를 하던 아이들 오후가 오랜만에 찾아온 밀짚모자 주위로 몰려든다

뻥튀기 소리에 놀란 해바라기, 발밑에 검은 태양들을 투투둑- 파종하고 늦게 외출한 채송화는 발뒤꿈치를 높이 꺼내 분꽃의 망설임을 흔든다 태양이 시작되면 빨간 인주통이 열렸다 몇 평 봄이 처분되는 계약서 그 끝, 마을경로당에선 코스모스와 금잔화가 형광빛 포스트잇처럼 끝도 없이 유예되고 있었다

이장 집 옆 모과나무가 늙은 귀띔이라도 들은 걸까 오래된 우물 속에다 노란 주먹을 툭툭 박았다 내가 헐값에 처분했던 그 시절 변두리 네온사인과 외딴집에 세를 든 귀뚜라미의 지하 방엔 오래도록 해가 들지 않았다 지난밤 거처를 잃은 두견새와 갑작스레 약수터에서 쫓겨난 달빛은 창문 틈에 허리가 끼어 아침까지 웅웅거렸다

누가 분실한 것일까

공사 중인 안테나처럼 힘껏 꼬리를 세운 고양이 한 마리

방금 눌러 찍은 붉은 태양이 채 마르지도 않은 부동산 계약서를 입에 물고서

인적 드문 논밭을 검은 천 조각처럼 가로질러 어디론가 재빨리 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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