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문학의 향기(공부방)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언어의 조각사 2017. 7. 1. 10:43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때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해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 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 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 시집 담장을 허물다(창비, 2016)

 

  2012년도를 통틀어 문예지에 발표된 신작시들 가운데 시인, 문학평론가, 출판편집인들의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아

그해의 가장 좋은 시로 뽑힌 작품이다.

시가 좀 길다 싶은데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한 감동을 자아내면서 독자를 덩달아 신나게 한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늘 문제를 야기했던 소유 개념에 대해 ‘담장 허물기’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한 성찰로써

내 것만을 소중히 여기는 배타적 소유욕을 시원하게 전복시키고 있다.

인위적인 소유의 경계를 허물었더니 새로운 소유의 영역이 기분 좋게 확대되어 펼쳐진다는 유머와 위트, 시적 낙관들로 유쾌함이 가득하다.


  담장을 허무는 행위는 스스로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나의 소유를 내려놓고 비우고 경계를 지워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실로 옹졸하고 협량한 소유욕에서 벗어나 통 큰 우주적 자아로 거듭나고 있음을 본다.

박노해 시인은 어느 시에서 ‘나쁜 사람’을 ‘나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적어도 세상을 나쁜 놈으로 살아가지 않으려면 제 것만 알고 제 것만 귀하게 생각하는 극단적인 이기심만은 버려야겠다.

이 시는 좋은 시 읽기의 미적 쾌감과 여운을 배가시키면서 그 대목을 명랑한 화법으로 가르치고 있다.


  누구는 왜 보수이고 또 누구는 진보일까.

어째서 평상시에는 진보적이다가도 어느 순간에 보수적으로 돌변하느냐 하는 것도 이기심의 함량이 얼마나 개입되어있느냐에 달려있다.

어느 하나로 일관된 생각을 견지하는 사람은 잘 보지 못했다.

이기적인 보수는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견고한 담장을 치겠다는 사고의 다름 아니다.

스스로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 가운데도 지독한 이기주의자들이 적지 않다.

대체로 진보성향의 사람은 사고가 개방적이고 리버럴하다. 상대적으로 융통성이 있고 담장의 높이가 낮다.

그래서 소통성과 확장성이 중요하다.


  이렇듯 담장을 허물어뜨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이 ‘큰 고을의 영주’로 탈바꿈하다니 얼마나 멋져버렸는가.

문재인 정부의 성공 여부도 이것에 달려있다고 본다. 더불어 우리 국민들의 마음도 그랬으면 좋겠다.

‘관홍뇌락(寬弘磊落)’이라는 좀 어려운 사자성어가 있다.

마음이 너그럽고 활달하여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아니함을 뜻하는 말로

넓은 도량을 갖는다면 과거 김영삼 대통령의 좌우명인 ‘大道無門’의 길이 열릴 것이다.

쌓인 폐단도 자연스레 청산될 것이며 산하도 재조될 것이다. ‘갈등공화국’의 오명을 벗고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리라.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때어내는’ 것만으로 우리 모두 부자가 되리라.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