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 문태준 아침 / 문태준 새떼가 우르르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했다 새떼가 몇 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상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 번 또 한 번 출렁했다 서 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 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 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2010.06.07
오이도/이효숙 烏耳島...이 효숙 1 섬의 뿌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멀미를 겨워하던 이웃들은 하나씩 짐을 꾸렸다 비워낸 자궁처럼 더 이상 불빛이 보이지 않는 빈집의 문들은 어둠 속에서 저 혼자 펄럭이고 허기진 별들은 버려진 그물 더미를 갉아먹으며 궁색한 밤을 비워내고 있었다. 아무와도 약속하지 .. 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2010.05.12
모래톱 이야기 - 화개에서 /곽재구 모래톱 이야기 - 화개에서 詩, 곽 재구 스무 해 전엔 바람이 산을 업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네 산을 업은 바람이 섬진강 모래밭을 오래오래 달려 황혼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네 모든 것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 시절에도 바람과 산이 한데 어울려 섬진강 물 속으로 깊게 잠기는 시간들을.. 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2010.05.07
사랑의 변주곡 / 김수영 의 변주곡 / 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都市)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三)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 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2010.04.18
거미/이수영 거미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음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음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음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렀다. <1954년> 일러스트=이상진 다가올 설음을 알기에 .. 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2010.03.24
속옷 속의 카잔차키스/이길상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속옷 속의 카잔차키스 이름 이길상 잘 갠 속옷 속에는 영혼의 세숫물이 썩어간다 눈을 씻어내도 거리의 습한 인연들 내 안을 기웃거린다 내 폐허를 메울 사막은 그때 태어난다 반성하듯 내복을 차곡차곡 갤 때 올마다 낙타 한 마리 빠져나간다 밤, 속옷을 갤 때마.. 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2010.03.21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도종환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도종환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 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2010.02.02
절연/이병률 어딘가를 향하는 내 눈을 믿지 마오 흘기는 눈이더라도 마음 아파 마오 나는 앞을 보지 못하므로 뒤를 볼 수도 없으니 당신도 전생엔 그러하였으므로 내 눈은 폭포만 보나니 믿고 의지하는 것이 소리이긴 하나 손끝으로 글자를 알기는 하나 점이어서 비참하다는 것 묶지 않은 채로 꿰맨 것이 마음이려.. 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2009.09.09
드라이플라워 _문 인수 드라이플라워 _문 인수 마음 옮긴 애인은 빛깔만 남긴다 말린 장미·안개꽃 한 바구니가 전화기 옆에 놓여 있다. 오래, 기별 없다. 너는 이제 내게 젖지 않아서 손 뻗어 건드리면 버스러지는 허물, 먼지 같은 시간들. 가고 없는 향기가 자욱하게 눈앞을 가릴 때 찔린다. 이 뽀족한 가시는 딱딱하게 굳은 .. 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2009.09.09
마지막 섹스의 추억/ 최영미 마지막 섹스의 추억/ 최영미 아침상 오른 굴비 한 마리 발르다 나는 보았네 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 파헤쳐진 오장육부, 산산이 부서진 살점들 진실이란 이런 것인가 한꺼풀 벗기면 뼈와 살로만 수습돼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 죽은 살 찢으며 나는 알았네 상처도 산 자만이 걸.. 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2009.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