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속옷 속의 카잔차키스/이길상

언어의 조각사 2010. 3. 21. 21:25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속옷 속의 카잔차키스

이름 이길상


잘 갠 속옷 속에는 영혼의 세숫물이 썩어간다
눈을 씻어내도 거리의 습한 인연들 내 안을 기웃거린다
내 폐허를 메울 사막은 그때 태어난다
반성하듯 내복을 차곡차곡 갤 때 올마다 낙타 한 마리 빠져나간다

밤, 속옷을 갤 때마다
개어지지 않는 내가 보인다
불운 견디게 하는 사막 풍경은 상향등처럼 켜지고
내 안의 나를 알고 있는 생이 뭔가 흘리면서도 아파할 것이다
서른 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감히 물을 수 없을 때 부르튼 입술은 길을 알고 있었다

맹인 바구니의 노래가 퇴근하지 못한 마음에 파고들수록
노래 속 세상을 그쯤으로 짚으며 난 힘겹다
감이 잡힐 나이, 노래의 무거움은 몸 밖에서 온다
우산 안에서도 젖는 내일의 삶, 울음 삼킨 시늉할까
그래 달콤한 사막 밤의 모래 폭풍은 고독으로 피어난다
몸 밖의 사하라, 헛것 두르며 새벽 추위마저 껴입는다
내 속 깊은 모퉁이는 안전하게 돌아나간다

안경은 양심의 속때, 나를 잘 아는 신발은 닳은 굽 한 장 더 깐다
사는 일로 얼어붙은 옥탑방, 열쇠 구멍 나를 열지 못했으므로
계단 낮아도 허공의 높이 착실히 밟아갔을 거다
응시할수록 더 귀 먹은 삶의 발목
흩어질 가시나무 속에 내 얼굴 보인다

발목 깊이 쌓이는 생
추운 종아리의 살빛, 많이 본 듯할 때
책과 길마다 죽은 하늘이 펄럭인다
속옷을 갤 때 후회의 올마다 낙타, 낙타들 쉽게 빠져나간다
거죽만 진지한 나의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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