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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문학상

언어의 조각사 2023. 10. 28. 19:14

당선금과 축하금, 꽃다발

이택재에서 동사강목을 읽다/ 김영미

 

학문의 밭은 넓다

아니 묵향의 아집에 가로막힌

학문의 밭은 비좁다

뻐꾹새 울음이 명리의 담장을 겨우 넘어와

한 사나이의 서책 속에서 실학을 찾아낸 건

한 시대의 기쁨이었을까

아니면

산 아래 구철초가

가을을 잘못 읽고 바람을 놓친 때문일까

동사강목,

한때 삿갓의 무게에 눌려

벼루 속에서 강낭콩 붉은 꽃을 바라보는 일이

힘겨울 때가 있었다

어짐이 때를 놓치면 탄식이 됨을 곰곰 되새기며

당쟁이 길어질수록 선비의 기개는 남루해지는

그 알 수 없는 누습을 견뎌내는 동안

누군가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 했고

누군가는 또 다른 아픔의 암중모색이라 했다

한 촌로가 통속 인분을 휘휘 저어

봄날의 호박밭에 뭉클 뿌리는

그 따듯한 가훈을 보면서도 선비를 벗지 못했다

숫돌도 왕후장상의 씨를 달리 벼리지 않는데

병풍 안쪽에서 이 고뇌를 놓지 못하는가

나는 안정복이다

불임의 역사 속에서 실사구시를 악몽처럼 지키던

불후한 르네상스의 가객이다

이택재의 바람은 조용히 서책을 닫고서

지난해 봄 꿩들이 덜 읽은 세상을 넘겨다 본다

 

남한산성/김영미

 

남한산성에 든다

아직 연둣빛을 벗지 못한

오월의 소롯길에 든다

산성을 찾는다는 건

돌들의 혜안을 내 마음속으로 옮겨놓는

천형 같은 일

산벚꽃의 풍성함을 놓친 뻐꾸기울음과

산의 뿌리를 놓지 못하는 물소리가

계곡 하나를 붙들고

구부정 멀어지는 풍경 속을 오른다

그날 사직을 내던지고

너른 벌판을 가로질러

비루한 눈물을 흘렸을

한 군주의 오후는 어떠했을까

끝내 섬김의 질서를 놓지 못해

죽음을 택한 그 학사들은

지금 어느 구천을 떠돌고 있을까

남한산성에 오른다는 건

슬픔의 중력을 새들에게 넘겨주고

후련한 발길만 챙겨

망각 속으로 유배되는 일이다

나지막한 성곽들이 낸 빈 허공마다

역사의 바깥을 기웃거리던 상투들이 보이고

아! 지금은 갈 수 없는

아주 먼 날 누란의 풍경들

오월을 가로질러 궁벽한 연둣빛의 요새

남한산성을 오른다는 건

과거의 볼모가 되는 일이다

꽃과 꽃들이 격리되고

계절과 계절들이 격리되는

그 오랜 관습을 견디는 사이

벽돌들의 생애는

얼마나 많은 이끼로 가득 찼을까

남한산성은 성이 아니다

뻐꾸기울음 하나도 숨기기에

목이 마른 슬픔의 은신처,

어쩌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하는

천형의 요새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한낮의 정적이 깊어질수록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그 알 수 없는 내막의 페이지를 찾던 나는

내 안의 무엇인가에 부름이라도 받은 듯

서둘러 벽돌들의 바깥으로 발길을 옮긴다.

 

2023년도 순암문학상 당선작

낡은 풍경에 은유되다/ 김영미

 

고택에 든다

쇠락한 시간이 이곳저곳 널브러진

조그마한 안마당이 주춤 기억의 뒤로 숨고

뒤꼍으로 향하는 처마 옆

살구나무만이 노란 인사를 하는 곳

이제 다시는

청빈의 주소를 꿈꾸지 않으리라 던

쓸쓸한 독백과

절구 속 봄날의 가난을 눈물로 빻던

곤궁한 푸념들이 되살아나고,

어쩌면 이맘때는 아니었을까

내가 논두렁 너머로 곡선의 심부름을 하며

아버지의 막걸리에 취한 그날 오후와

풀잎처럼 지친 몸을 맞이하던 고택의 지조,

방금 뒤꼍을 한 바퀴 돌아나온 바람에도

단추 같은 열매를 몇 개 내줄 것 같은

늙은 감나무 풍경을 상상해 보는 일,

고택은 그러나 고택을 꿈꾸지 않는다

낡은 풍경을 복사하지도 않으며

그렇다면 지금

고택이 꿈꾸는 건 정작 무엇일까

맨 처음 자신 속에 주소를 열었던

바로 그 시절의 꿈,

세상 저쪽 바람이 문지방을 넘을 때마다

은유처럼 닳던 그 체온에 대한 그리움

밖으로 나서자

앞산 뻐꾸기 울음만이

기억의 원근법이라도 익히는지

가까워지다 멀어지곤, 한다

 

당선자와 내빈

환절기/ 김영미

 

일교차가 다녀간 새벽

저 흰 무리들은 불면의 자객이었을까

창과 밖의 거리는 지워지고

구름 위 하늘만 푸르다

몇 개의 아파트와 건너편 숲이

흰 통증 속에서 벗어나고

무겁게 멈춰있던 은행나무 잎들이

노란 전설을 찾지 못한 채

하나씩의 가로등을 풀어 주고 있다

순간 내가 신선인 듯 몽환의 길에 든다

불면으로 휘청이던 새벽

구름 속 37층은 공중부양 중이다

어둠은 그늘조차 파종할 수 없는 것

달빛에 감긴 간밤 꿈이

계절을 염탐한 안개와 함께

가로등 안으로 사라진다

더 깊은 곳으로의 은신과

묵정의 날들을 견디는 동안

1층에서 37층을 오르던

세월의 간극도 사라졌다

안개 속에서 여름날의 단서를 찾는 동안

태양은 때늦은 나의 독백을

공중으로 밀어내고

창밖 풍경을 말끔히 펼쳐놓는다

태양의 울타리 안에서 서성이면서도

스스로에겐 보이지 않는 오랜 불청객,

나는 침묵으로 더 깊이 은신해야 할

하얀 충고 속으로 잠행하는 안개다

딸과 사위의 축하 꽃다발&축하금
꽃다발과 당선금
손녀, 다인이의 축하를 받다.~^^
박성희수필가와 박소영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