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시래기-푸른 연대기

언어의 조각사 2022. 11. 29. 11:57

 

푸른 연대기/ 김영미

 

이곳 어디쯤에선가

몇 줌의 바람과 음지의 날짜들이

발효의 관습을 보내게 될 것이다

흰 몸통의 줄기 가까이 이르러

파란 기억을 머금은

그쯤을 움푹 자른다

시래기,

나는 잠시 오래전의 농경이 가르쳐준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곤

벽 양쪽에 줄을 매단다

봄이 더디게 들어찰 뒤꼍 근처가

무청들의 물결로 눈부시고

그래, 먼 옛날의 어머니도

당신의 월동 한편에 먹거리를 섬겼을 것이다

겨울이 길어야 맛의 질서를 더 깊이 품어내던

바람과 바람 음지와 음지 사이의 영험한 내력들

어머니의 아침이

늦겨울 장독대에서 된장을 퍼오자

발효를 마친 시래기 몇 움큼

부엌 함지박으로 들어서고

그날 잘 떠지지 않는 내 눈을 깨워주던

아궁이 불씨는 어느 동화 속 이야기였을까

늦겨울 아침의 식욕은

늘 아버지의 시장기로부터 시작된다

한순간 어머니가 뚜껑을 열자

아버지의 건넛마을 소식이 김 서림에 지워지던,

오늘도 나는

두레상에 둘러앉은 구수한 맛을 소환한다

지난한 날들 속에서도

부서지거나 끊어지지 않던

어머니와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질기게 이어온 시래기의 동화가

도심의 식탁에서 보글보글 피어난다

 

2022.11.27

2023년 6월-모던포엠 이달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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