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그늘의 시간을 보다/김영미

언어의 조각사 2022. 8. 30. 13:00

그늘의 시간을 보다/김영미

 

 

얕은 산속을 산책하다가

문득 눈이 띈 버섯무리들,

현란함으로 보아 독버섯임에 분명하다

노란빛 혹은 형형의 색채 속에서

독성의 날들을 보낸다는 것

썩거나 죽은 나무의 그늘을 섭취하며

햇살의 반대편을 느린 생애로 버텼을,

내 안의 사랑도 그랬을 것이다

무례한 감정의 방문과

현란한 타협을 요구하는 젊음의 뒤안길에서

나의 사랑도

아픔들 상처들을 보호하기 위해

독성의 은신처를 빌려야 했으리라

사랑은 독이다

아니, 내 안의 느린 시간을 보호하기 위한

썩은 양분들이다

습기 찬 계절 속을 서성인다는 건

얼마나 찬란한 관습이던가

나는 그늘들의 시간을 지우고서

밤의 입구

이슬들이 몰려오는 또 다른 감촉들에게

귀를 적시기 시작한다

 

2022년 문학청춘 발표작
2022년 착각의 시학 사화집

'시작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단서  (0) 2022.10.26
환절기  (0) 2022.09.22
낡은 풍경에서 깨어나다  (0) 2022.08.13
노숙자  (0) 2022.07.20
오월의 양식 / 김영미  (0) 2022.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