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시간을 보다/김영미
얕은 산속을 산책하다가
문득 눈이 띈 버섯무리들,
현란함으로 보아 독버섯임에 분명하다
노란빛 혹은 형형의 색채 속에서
독성의 날들을 보낸다는 것
썩거나 죽은 나무의 그늘을 섭취하며
햇살의 반대편을 느린 생애로 버텼을,
내 안의 사랑도 그랬을 것이다
무례한 감정의 방문과
현란한 타협을 요구하는 젊음의 뒤안길에서
나의 사랑도
아픔들 상처들을 보호하기 위해
독성의 은신처를 빌려야 했으리라
사랑은 독이다
아니, 내 안의 느린 시간을 보호하기 위한
썩은 양분들이다
습기 찬 계절 속을 서성인다는 건
얼마나 찬란한 관습이던가
나는 그늘들의 시간을 지우고서
밤의 입구
이슬들이 몰려오는 또 다른 감촉들에게
귀를 적시기 시작한다
2022년 문학청춘 발표작
2022년 착각의 시학 사화집
'시작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단서 (0) | 2022.10.26 |
---|---|
환절기 (0) | 2022.09.22 |
낡은 풍경에서 깨어나다 (0) | 2022.08.13 |
노숙자 (0) | 2022.07.20 |
오월의 양식 / 김영미 (0) | 2022.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