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풍경에서 깨어나다/김영미
고택에 든다
쇠락한 시간이 이곳저곳 널브러진
조그마한 안마당이 주춤
기억의 뒤로 숨고
뒤꼍으로 향하는 처마 옆
살구나무만이 노란 인사를 하는 곳
이제 다시는
청빈의 주소를 꿈꾸지 않으리라던
쓸쓸한 독백과
절구 속 봄날의 가난을 눈물로 빻던
곤궁한 푸념들이 되살아나고
어쩌면 이맘때는 아니었을까
내가 논두렁 너머로 곡선의 심부름을 하며
아버지의 막걸리에 취한 그날 오후와
풀잎처럼 지친 몸을 맞이하던 고택의 지조
방금 뒤꼍을 한 바퀴 돌아 나온 바람에도
단추 같은 열매를 몇 개 내줄 것 같은
늙은 감나무 풍경을 상상해 보는 일
고택은 그러나 고택을 꿈꾸지 않는다
낡은 풍경을 복사하지도 않으며
그렇다면 지금
고택이 꿈꾸는 건 정작 무엇일까
맨 처음 자신 속에 주소를 열었던
바로 그 시절의 꿈
세상 저쪽 바람이 문지방을 넘을 때마다
풍경소리처럼 닿던 그 체온에 대한 그리움
밖으로 나서자
앞산 뻐꾸기 울음만이
기억의 원근법이라도 익히는지
가까워지다 멀어지곤 한다
2022.08.12
메모-
저녁 무렵 고택의 풍경은
알루미늄처럼 위태롭다.
내 오랜 기억의 담론을 끌어안은
저 기왓장의 이끼처럼 담백하거나
그래서 더 따듯한,
하지만 뒤꼍으로 들어가야 할 의미에 대해선
아직 결정할 은유들이 없다.
저 기왓장의 담론을 살릴 용기도 없지만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고택을 걷고 있다.
2023.제 6회 순암문학상 당선작
2023.시와수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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