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시인의 참 시詩 방앗간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49회] 고흥 장터에서

언어의 조각사 2025. 2. 4. 15:38

고흥 장터에서/ 김영미  

 

하루치 바다를 함지박에 담아
은빛 지느러미 몇 개 풀어 놓는 곳
세상의 흥정들은 이곳에 와서 발을 멈춘다

링거액처럼 줄어드는 아버지 일대기는

거친 풍랑을 견디고도 만선한 기억인데

이마트에서도 롯데마트에서도
그리움의 바코드 찍지 못하는
뜯겨 나간 페이지 속 기억의 낱장들

 

누군가는 전생의 여독이 보부상처럼 떠돌아야
겨우 닿을 수 있다 하고
누군가는 후생에서나 돌아갈 수 있다는 곳
유자향이 돌아와야 어시장이 깨어난다던
생물로 팔려나가던 바다가 고흥에선
구이가 되어 넘겨지던 풍습이 불꽃을 피운다

 

소금기가 희미한 날
설령 바다가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에 끌려온
그 혼신의 형체가 될지라도

더 이상 거짓 없는 새벽에 이르면
사라진 연기 너머에 무엇이 보일까

 

아버지 후생의 어느 여울목에
자식들은 은빛 지느러미 되어
아버지 어깨를 치고 오른다

 

[作詩메모]

- 사랑으로 더께 입은 유물을 찾아

 

나에게 큰 나무와 같던 아버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되어도

좀처럼 젖거나 부서지지 않는 무쇠로 만든 책 같은 존재였다.

찬 서리에 못이 박혀도 염천을 견디면서 땀을 뻘뻘 흘려도

좀처럼 젖지 않는 꿋꿋한 나무로만 보여서 나는 그 책에서 달콤한 열매와 햇살만을 읽었다.

 

무기력한 나의 일상들이 부상하려는 새의 무게만큼 지탱하기 힘들 때면,

아버지를 그리며 그 큰 사랑의 유산으로 힘을 얻곤 했다.

그런 아버지와의 추억이, 뜯겨 나간 책장처럼 기억에서 멀어지고

남편과 자식 그리고 손주만 바라보는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단했을 아버지 어깨가 든든한 나무로만 보였던 것은,

드러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던 아버지의 너그럽고 따뜻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렇게 과묵하고 든든하던 아버지가

치적과 공적의 부피만큼 과시하고픈 내 마음을 조근조근 다독인다.

 

▼ 골프타임즈 가는 길

골프타임즈 모바일 사이트,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49회] 고흥 장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