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현상/ 김영미
라일락 나무가 있는 골목은 한낮에도 어둡다
기억들이 어둡고
전신주에 묶인 주소들도 어둡다
때론 봄도 하품하며 몇 걸음으로 지나친다
초록 대문 안에서
개 한 마리가 컹컹 짖어대자
라일락은 깨어나
발칵 제 향기를 퍼뜨리기 시작하고
집안의 고요가 깨지며 잠시 창문이 열렸다 닫힌다
열렸다 닫히는 순간
먼 옛날의 외판원을 소환한다
소설책 몇 권 들고 와
그 속에서 라일락의 페이지를 꺼내서
흰빛의 생애를 설파하던 시절을 기억하는 일
어느 누가 라일락을
가을 속에서 찾아낼 수 있겠는가
세월이 흐를수록 라일락은 더디 갈 것이다
최루탄에 고장 난 봄이 좀체 켜질 것 같지 않던 시절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발견한 라일락을 던져 준
초록 대문 안으로 잠입한 그 전단지
지금 광화문을 흔든다
[作詩메모]
한동안 봄의 금단현상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씨앗들의 일정을 망각한 나의 손끝과 내 몫의 햇살들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자연으로부터의 도피 도시가 늘 금단의 성지가 되는 것도
오랜 지병인 내 안의 게으름 때문이겠지요.
눈물겹도록 숭고한 삶을 비집고 꽃망울이 부풀고
연둣빛 풀무질로 봄은 우렁차게 환호성을 뿜겠지요.
우리는 그 샛노란 희망의 주소로 옮겨갈 채비를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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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타임즈 모바일 사이트,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50회] 라일락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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