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시인의 참 시詩 방앗간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6회] 곡선의 현상학

언어의 조각사 2024. 3. 8. 11:22

경칩보다 먼저 깨어나던 아버지의 천수답

 

겨우내 숨어있던 온갖 생명이 놀라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 아버지의 농기구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움을 터트리는 봄비보다 먼저 논두렁을 정비하며 농사일을 시작하던 아버지 덕분에, 나의 어린 시절도 푸르고 풍요롭게 피어났다.

그곳에는 곡선의 논두렁과 그 주위를 차지하던 개구리들의 하모니가 성장기 지분으로 남아있다.
외부의 접근이 있을 때마다 일제히 멈추었다 다시 시작되던 그 소리에는, 우주와 교신하는 지상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동심의 눈을 통하면 하늘바라기 땅은 구름의 정류장이 되고, 조물주의 지문처럼 펼쳐지던 천수답은 멋진 풍경화로 마음에 자리했다.

선조들에겐 하늘이 내린 천형이었겠으나, 고단했을 조상들과 부모님의 아름답고 거친 그 손을 다시 잡아보고 싶다.

 

 

곡선의 현상학

                    김영미

 

바람의 소문에 이끌려 온 것들은 등이 푸르다
구름이 더 낮은 발소리로
그곳을 지나치려 하는 것도
봄날 뻐꾸기의 울음이
그곳을 한달음에 가로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논두렁은 그러나 곡선이 아니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는
저 논두렁을 곡선의 사연으로 건너지 못했다
곡선의 혜택을 받지 못한 분들이다

 

풍요 속의 빈곤을 헤아리는
가문에서 태어난 봄날의 족보가
나를 더 오래 붙들어주지 않고
또 다른 가문의 곡선 속으로 떠나보낸 것도
어쩌면 곡선을 곡선으로 보지 않으려는
가훈의 영향일지 모른다

 

몇 걸음의 호흡만 갖고도 논두렁은 끝이 났다
짧다는 건 논두렁이 택한 마지막 유언이다
그리하여 논두렁을 찾는다는 건
비관주의자의 마지막 희망주의며
그 안 소작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씨앗들의 나지막한 대합실이다

 

논두렁을 걸을 때마다 책가방은
흐릿한 논물에서 일그러지기 일쑤였고
질경이가 먼저 건너가야
주린 배를 채우던 봄밤의 개구리 소리가
푸른 야광으로 빛나야 열리던 길이었다

 

욕망이 월담을 하면
투전판 승자의 몫으로 문서가 바뀌던
그 논두렁을 걷던 소녀는 지금
세상의 어떤 직선들을
곡선으로 바꾸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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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6회] 곡선의 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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