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시인의 참 시詩 방앗간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3회] 남한산성에 들다

언어의 조각사 2024. 2. 19. 21:34

- 한의 역사를 품고 오랫동안 버텨온 희망의 횃불

 

[골프타임즈=김영미 시인]

지난해 5월 친구와 함께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 둘레 길을 거닐며 오랜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섰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남한산성은 연둣빛 날짜를 넘기며 간밤의 비로 몸살을 앓았는지 꽃잎 양탄자를 펼치며 반겨줍니다.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조선 인조 4년에 대대적으로 구축한 남한산성은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성곽이라고 합니다.

산성의 둘레가 12km에 이르러 산 위에 도시가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라서,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였다니….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그 위엄이 자랑스러웠습니다.

혹자는 남한산성을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역사현장으로 기억하며 치욕의 성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계절이 아름다운 남한산성은 오랫동안 버텨온 견고한 항거의 역사이고,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민초들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산성이며,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인들의 피난처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견고하게 익어가고 있을 남한산성의 길목은 늠름한 자태로 누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병자년 그날의 함성과 울음도 저렇게 산성을 밝혔으리라 가늠해 봅니다.
산성에 깃든다는 것은 역사 속의 페이지를 벗어나 그 상처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한산성

 

남한산성에 든다
아직 연둣빛을 벗지 못한 오월의 소롯길에 든다
산성을 찾는다는 건
돌들의 혜안을 내 마음속으로 옮겨놓는 천형 같은 일
산벚꽃의 풍성함을 놓친 뻐꾸기울음과
산의 뿌리를 놓지 못하는 물소리가
계곡 하나를 붙들고 구부정 멀어지는 풍경 속을 오른다
그날 사직을 내던지고
너른 벌판을 가로질러 비루한 눈물을 흘렸을
한 군주의 오후는 어떠했을까
끝내 섬김의 질서를 놓지 못해 죽음을 택한
그 학사들은 지금 어느 구천을 떠돌고 있을까
남한산성에 오른다는 건
슬픔의 중력을 새들에게 넘겨주고
후련한 발길만 챙겨 망각 속으로 유배되는 일이다
나지막한 성곽들이 낸 허공마다
역사의 바깥을 기웃거리던 상투들이 보이고
아! 지금은 갈 수 없는
아주 먼 날 누란의 풍경들
오월을 가로질러
궁벽한 연둣빛의 요새 남한산성을 오른다는 건
과거의 볼모가 되는 일이다
꽃과 꽃들이 격리되고 계절과 계절들이 격리되는
그 오랜 관습을 견디는 사이
벽돌들의 생애는 얼마나 많은 이끼로 가득 찼을까
남한산성은 성이 아니다
봄날의 뻐꾸기울음 하나도 숨기기에
목이 마른 슬픔의 은신처,
어쩌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하는
천형의 요새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한낮의 정적이 깊어질수록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그 알 수 없는 내막의 페이지를 찾던 나는
내 안의 무엇인가에 부름이라도 받은 듯
서둘러 벽돌들의 바깥으로 발길을 옮긴다.

 

시인 김영미
2003년 문예사조에 시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경기 광주지회 9대 지부 회장 역임, 시와수상문학 감사. 시집으로 ‘지렁이는 밟히면 마비된 과거를 잘라 버린다’ 착각의시학 제1회 시끌리오 문학상, 시와수상문학 문학상, 순암 문학상을 받았다.

김영미 시인  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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