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시인의 참 시詩 방앗간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7회] 나는 날마다 홀컵을 지나친다

언어의 조각사 2024. 3. 15. 10:12

모두의 마음 텃밭이 싱그럽기를

 

[골프타임즈=김영미 시인]

   봄날의 마늘밭에 골프공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겨울을 견딘 마늘의 뾰족한 잎들이 새의 부리처럼 단단하게 골프공을 물고서...

제 촉수를 숨기고 마늘밭을 차지했던 삭풍과 겨울의 햇살 속으로

메마른 이름들이 지나치고, 들짐승과 참새들 발자취도 스며들었지요.

그곳에 속을 드러내지 않는 골프공이 제 삶의 뭔가를 잃어 홀컵이라도 찾은 듯,

마늘밭 한 편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속을 다 드러낼 수 없는 것이 인생의 무게가 아닐까 생각해 보는 풍경입니다.

삶의 짊은 누구나 다르지만 그 중량감은 각자의 마음에서 작용하지요.

온 몸 가득히 봄을 충전하며, 우리 모두의 마음 텃밭이 싱그럽기를 바랍니다.

 

 

나는 날마다 홀컵을 지나친다/ 김영미

 

골프장 입구엔 위장인 듯 칡꽃도 핀다
박세리
그 불멸의 아가씨도 핀다

 

가끔 골프장으로 가는 길을 볼 때마다
박세리의 이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언젠가 벙커 속에서
양말을 벗고 홀컵 속으로 갔던
한 소녀를 기억한다

 

홀컵이란 욕망이 찾아왔던 주소가 아니라
마음을 비워야 분지가 되는
원근법의 성역이라 했던가

나는 평일의 느끼한 근육이 날려 보낸
흰 거위알 같은 골프장 근처를 지나친다

 

골프장 반대편엔 시가 있다
칠판의 분필도 못 되는 망초꽃은
출퇴근 시간표에 걸린 음계를 펼치며
일개미와 베짱이의 마음을 읽고
가로수 잎사귀마다

바람의 사연을 빼곡히 적은 공중의 푸념을
화물차 바퀴는 귀를 열고 듣는다

 

한 세상을 휘어잡던 태양에게 내준
뒤틀린 앙금의 문턱마다
푸른 기억의 넝쿨을 덮으며
칡꽃은 질기도록 환하게 시를 읊는다

 

▼ 골프타임즈 가는 길

골프타임즈 모바일 사이트,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7회] 나는 날마다 홀컵을 지나친다 (thegolftimes.co.kr)

삽화: 박소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