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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상상력의 확장과 매혹적 형상(形像)

언어의 조각사 2021. 8. 28. 10:25

문학평론김영미 시인의 시적 상상력의 확장과 매혹적 형상(形像) - 엄창섭

전형철추천 0조회 67018.02.10 09:02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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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상상력의 확장과 매혹적 형상(形像) 
        -김영미 시인의 시 심리의 공감대와 사유의 추이(推移)
                                         엄창섭(사)k-정나눔 이사장, 본지 주간)

         1. 통섭(通涉)의 삶과 자의적 은폐

  모름지기  ‘시적 상상력의 확장과 매혹적 형상-김영미 시인의 시 심리의 공감대와  사유의 추이’를 선명하게 투사하기 위해 생명기표로 시적 상상력을 확장하여 통신하며 집중과 선택의 새로운 공간을 제공하는 『모던포엠』173호「모던포엠 포커스」에서 한층 안정된 감응으로 시의 지평을 존재감 있게 열어 보일 심전(心田) 김영미 시인은, 충절의 향리(鄕里)인 충주 태생이다. 그는 ‘추억을 자신의 환상 속에서 재생하여, 그것을 자신의 이미지와 합치시키는 점이 놀랍다.’는 시평처럼 그 자신의 시편 <추억의 그림자>, <목련꽃>, <어름꽃>으로 월간『문예사조』(2003)를 통해 등단한 뒤, 2009년 시집『지렁이는 밟히면 마비된 과거를 잘라버린다』발간 이후에, 경기도 광주문인협회 지부장을 역임한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이다. 
  모처럼 월간 『모던포엠』 관계자의 세심한 배려로 다소 인상 비평적일지라도 새로운 조명의 기회가 주어져 그 나름의 ‘유형적 인상과 감성시학-시 심리의 변주와 시적 사유(思惟)에 관한 심층적 논의’는 유의미한 정신작업이다. 따라서 그 자신이 불멸의 시혼을 일관성 있게 ‘섬세한 시어로 풀어낸 전의식(前意識)과 결부지어 이 같은 시적 특이성의 일깨움’은, 신으로부터 허락받은 온전한 삶을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으로 감내하려는 지극히 합리적인 시적 변명으로 풀이되기에 결코 머뭇거림은 허락되지 아니한다. 한편 자의적 은폐가 아닌 통섭(通涉)과 분별력에 의한 푸른 생명기호로 통신한 김영미 시인의 역할 수행과 <엄니도 여인이었어라>, <아카시아>, <꽃·5-시발점> 외 7편을 통한 시적 감응(感應)은 감동의 회복을 불러주기에 부족하지 아니하다. 비록 지금 서로 간 같은 공간에 머물지 않더라도 시에 대한 그의 남다른 열정은, ‘항시 마르지 않는 시의 샘(泉)에서 발원(發源)한 시적 질료를 눈부신 존재의 꽃으로 피워낸’ 고매하고도 절제된 감정의 결과물이기에 시들지 않는 한 떨기 시의 꽃은 그만의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탱하고 있다.  
  각론하고 그의 시정신과 존재감을 탐색하기 위한 시작품의 분할·통합에 앞서 문학사적 서술이라면, 에밀 슈타이거(E.Steiger)가  ‘시인은 자연을 회감(回感)하고 자연은 시인을 회감한다.’라고 기술하였듯, 시적 자아에서 분출되는 서정성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물에 대한 주체의 동일자적 욕망의 산물로의 인식이기에 동일자적 욕망으로 타자를 응시함으로써 타자를 왜곡시킬 수 있는 점과 타자 중심의 사유를 관통해 공감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가능성에 비추어 유추할 때, 그의 순수서정감은 양면성을 지닌다. 이와 같이 평자에게 있어서도 독자들이 시적 거리감을 의외로 여길 여지는 주어지나 짐짓 자기애(Narcissism)와 이중적 거리를 충직하게 유지하며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이름인 모성(母性)’을 객관적 상관물로 대치시켜 타자에 대한 각별한 관심사와 배려는 더없이 남다르다. 
  차지에 “먼지를 걸러낸 도시 그림자가/태양의 입술을 훔쳐/구찌뻬니에 숨을 불어 넣는다/그 순간,/사막에서 깨어난 붉은 언어들이/태양이 달궈놓은 세월의 허기와/빈사(賓師)의 예언보다 빛난다//나는 그녀가 건넨 *나르시시즘 비늘을 세우고 서랍 속으로 들어선다.(엄니도 여인이었어라)”는 시적 수사에서 ‘다소 상이한 제후(諸侯)로부터 빈객(賓客)의 대접을 받던 학자의 빛나는 예언은 「하디스」의 “학자의 잉크는 순교자의 피보다 신성하다.”는 가르침과도 무관치 않거니와  “왜 이제야 알았을까/엄마 가슴에서 쏟아지던 바람이/왜 이리도 간절해지는 걸까/산딸기가 정오의 햇살을 쪼아댄다/땡볕을 부수는 붉은 가슴이/그늘로 숨어들던 발길을 붙잡는다/태양이 뭉클,/손바닥으로 쏟아진다(땡볕아래서)”에서와 같이 그 자신이 즐겨 사용하는 시적 질료는, ‘한 순간의 격정과 끓어오르는 분노에 평정을 안겨주어 감미로운 심적 현상을 유지시켜주는 역동성에 의한 생산적 결과물’로 입증되기에, 이 같은 심층적인 분할·통합은 마침내 좋은 시인과의 만남 곧,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행운과도 잇닿아 ‘김영미 시인의 시 읽기와 감상은 못내 시흥의 응축(凝縮)’에 틈새를 허락되지 아니한다.

         2. 심상(心象)의 발현과 맑은 영혼의 진동 

  어디까지나 진지한 탐색과 각고의 노력 끝에 ‘심상의 발현과 맑은 영혼의 진동’을 형태의 추구에 접합시켜 독자적인 조화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시인의 특성을 지닌 예술적 삶에 있어, 한번쯤  ‘공간과 시각, 그리고 시적 중량감’에 관한 합리적인 이론에 접근하여 검색을 시도하는 작업은 의미심장하다. 일단 생생한 일탈의 시 정신에 있어 예술적인 질감과 터치의 대비는 자연에의 회귀(回歸)를 형상화시킨 화자 자신의 역주(力走) 뒤의 휴지부(休止符)에 해당하기에, 어디까지나 김영미 시인의 시적 행위는 탈진(Burn-out)된 영혼에 생명감을 다시금 일깨워준 역동적인 생명감에 견주어짐은 무론하고 종종 감동의 인자(因子)로 작동한다. 이와 같이 매사에 적극적이면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는 무론하고 자기 헌신적인 면모와 여성스러움, 그리고 수분(守分)의 철학을 지닌 화자의 존재감은 꽃말이 ‘비밀스런 사랑, 품위’로 풀이되는 그의 시편 <아카시아>에서 새삼 빛날뿐더러  ‘빛을 잃지 않는 결정체, 생명의 씨앗’은 더없이 소중할 따름이다. 

      바람결에 묻은 꿈이 하얗게 부서져 
      푸른 돛을 답니다 
      그 길에서 빛을 잃지 않은 씨알 하나 
      가슴에 
      품
      습
      니
      다.         
            -<아카시아>에서

  위에서 인용한 시편 <아카시아>는, 인간과 세계의 비극적 심부(深部)에 전심전령(全身全靈)을 던져 심적인 재현이 낳은 과거의 시각화(視覺化)가 아니라, 보다 가시적인 그 특이성은 심상의 명확성과 언어의 상징미를 통해 흐트러짐 없는 맑은 영혼의 울림으로 지상에 나직이 갈앉은 음조(音調)로 서정적 미감을 ‘가슴에 품는’ 시적 기교(craft)로 처리한 결과이다. 까닭에 시적 기법과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독자의 자의식과 공감을 일깨워준 김영미 시인의 시편에 관하여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Zeus)를 도와 계절의 변화를 관장하는 여신 호라이(Horai)처럼 ‘빠져나간 수분처럼 자신을 비우던 자식에게 저당 잡힌 주름진 생은 소금 꽃을 피워내는’ 어버이의 지극선의 희생 앞에서, “언 발 녹여주던 긍휼한 흙의 무게/지난한 시절 공복과 입김들이/씨눈으로, 꽃눈 속으로 모여든다/*호라이(Horai)보다 먼저/아비의 곡괭이는 산야에서/어미의 바늘은 밤샘으로 분주했다(꽃·5-시발점)”라는 시적 발상은 삶의 일상에서 감동을 회복시켜주기에 결코 부족함은 수용되지 않는다. 
  한편 그 자신의 시편에서 시적 행간을 좁혀주는 시어(詩語)의 씀씀이는 푸른 식물성에 의해 한층 생명적이기에 그의 창조적 영혼은 특이하다. 따라서 시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조심스런 균형(均衡)의 몸짓’ 또한 일관성에 기인(起因)은 좋은 반응과 시적 감응을 불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처럼 그의 시적 역동성은 ‘본질적 향수와 인간애에 깊은 관심’의 지속적인 표명일뿐더러, 따뜻한 정신기후의 조성과도 일맥상통하기에 인생의 따뜻한 정감과 교시(敎示)가 묻어나고 있음 또한 유념할 바다. 이 점에 있어 모성애의 애틋함과 온유함에 깊이를 더하여 역사의 정체성의 잇닿음은 시적 정조(情調)와 축(軸)을 함께하고 마침내 “꽃을 빛나게 하던 조용한 조력의 시간들,/그 숭고한 어우름으로 빛을 더하는/남한산성 발걸음이 듬직하다/나뭇잎들이 햇빛 퉁기며 하늘을 닦아/병자(丙子)년 밀서를 꺼내본다/인조의 눈물 삼킨 솔숲 사이로/광해군 등거리 외교가 빛난다(남한산성·2)”에서 ‘병자호란을 겪으며 굴욕과 분열의 역사의 현장인 남한산성’ 그 치란(治亂)의 처연함은 영혼에 잠식(蠶食)되고 전율처럼 파생되기에 이른다. 그와 같이 우리네 삶의 본말(本末)을 김영미 시인은 생명경외(敬畏)로 인식하고 수긍하기에, ‘아득한 절벽 또는 천형(天刑)의 족쇄를 찬 암울한 운명체’가 아닌 밝음 지향주의의 추이(推移)로 해명하고 있음은 더없이 유의미하다.    
  특히 시인의 내면의식에 존재하는 감성은 내면에서 영감의 형상화에서 얻어지는 다른 영적인 체험이 새로운 구도를 형성시키기에, 김영미 시인은 영혼의 밝은 창(窓)을 비밀스럽게도 창조주를 향해 열어 놓고 있다. 이것은 운명적으로 그의 육신은 땅(Gaea)에 거처하고 있으나 ‘봄물에 휘는 나무를 본다 꽃망울 핥던 바람으로 글자들이 물렁해지고 있다’의 지극히 예민한 시적 감성은 “탈고 못한 문장처럼 버석거리는/겨울의 끝자락/그 긴 기다림의 모퉁이에서/해빙의 시간을 견디고 있을/나무의 빈칸에 봄을 적는다.(나무의 문장)”와 같이 인고(忍苦)의 시간대를 걸친 새로운 기대감과 생명의 환희로, 가끔은 그 자신의 시적 변명처럼 ‘그 긴 기다림의 모퉁이에서’ 심상의 일부를 형사(形似)하면서도, 담백한 시격(詩格)에 담아 고매한 시인으로서 존재의 꽃을 형상화하며 ‘나무의 빈칸에 이름을 적는’ 몸의 시학은 처연(悽然)해 눈물겹다.
  모처럼 시인의 삶에 대한 보편성은 그의 시편에 전통적인 다양성을 순수서정에 담아 줄기차게 형상화시켜낸 그의 집념은 소우주의 표징으로 한층 의식의 내면에 그 깊이와 중후 감을 수용한 찬란한 미감(美感)이기에 그만의 천부적인 시적 재능은 신선하여 때로는 충격적이다. 그러나 삶의 현상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과거지향적인 심사(心思)에 집착하면서도 잇닿은 시간대를 축으로 정신세계를 존재와 따뜻한 감성의 융합으로 펼쳐 보인 그의 지난한 몸짓은 생명에 대한 일깨움이다. 마치 그 같은 양상(樣相)은, “의문부호들과 고장 난 양심으로 들끓던 그 겨울 지나고 태양의 환승역에서 고단한 달빛이 개찰구를 빠져나올 때도 촛불 밝히며 기다리던 봄, 춥다/술렁이던 숲 한 켠엔 직립의 침묵을 다지는 나무들이 스위치를 켠다/광장을 지키던 꽃망울도 양볼 가득 햇살 머금고 부풀리지만 아프다/밀반입된 내 안의 *플로라가 얼음벽과 충돌한다(봄, 그 문턱에서)”의 현상처럼 물질적인 관심에 초탈한 그의 영혼은 깨끗한 눈물에 씻겨 투명하기에, 창조적 영혼은 아름답고 위대하다. 따라서 ‘아름다운 동행이란, 같이 우산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행위’이기에 못내 가슴 저려오는 아픔을 한 사람의 충직한 독자라면 지극히 절박함으로 ‘고단한 달빛이 개찰구를 빠져나올 때도 촛불 밝히며 기다리던 생명의 봄’을 결코 외면할 수 없다. 
  오랜 날, 흘러간 시간과 하찮게 버려지는 우리의 ‘관습과 제도, 그리고 박제된 글자, 늙은 서정의 간이역’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대한 관심으로 정체된 전통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빗나간 전통의 실을 자신의 시편에 수용하여 다시 꼬아 넣는 작업을 견고한 고독으로 처절하게 지속해온 김영미 시인의 추상작업(object)은, <겨울과 봄 그 틈새>의 간극(間隙)을 하나의 모형인 ‘늙은 서정의 간이역’으로 인간적 삶을 조화와 신비로움으로 형상화시킨 감별력을 ‘향기로운 아픔’에 견주어 유형의 인상에 민감한 그의 시적 기법을 다시금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무의 뻣뻣한 뼈가 부드러워지고/그 속에 박힌 박제된 글자들이 꿈틀댄다/혹한을 견디며 꽃잎에 이르는 길은 향기로운 아픔/겨울에 묶였던 몇몇의 숫자들이 슬몃 사라지는/늙은 서정의 간이역이다//              -<겨울과 봄 그 틈새>에서   
  
  그렇다. 위의 인용한 시편에서 확증되어지듯 지극히 선한 심성과 강직한 품격으로, 시적 정조를 엄격히 통제하고 즉물적 현상을 적확하게 매듭짓는 ‘합리성, 그 모순에 의한 思惟’에 세심한 김영미 시인의 시적 표징은, ‘혹한을 견디며 꽃잎에 이르는 길은 향기로운 아픔’이라는 이미지의 형상화를 통한 시인의 지극선(至極善)과 공감을 불러줄 홀로 있기(思惟)에 잇닿아 불확실성에 처한 현대인의 피폐된 영혼에 생명기표로 올 곧게 통신하는 화자의 배경지식(schema)은 쉽사리 지워낼 수 없다. 

        3. 극소수의 창조자, 그 아름다운 동행 

  모름지기 비열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우리네 삶의 일상에서 그 자신은 시문학에 감전되고 심취된 시 쓰기로 일관하였음은 주지할 바이나, 어렵지 않게 그의 시편을 통하여 주저함 없이 확인되어지는 것은 일몰의 시간대에도 낙조(落照)를 응시하다 못내 눈시울 붉히는 일상이거나 또는 슬픈 노랫가락에도 옛 정취에 온통 취해 그렇게 인간적인 면이 돋보이고 사람의 체취가 묻어나는 점일 것이다. 여기서 애써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 나름으로 소외된 인간관계성의 회복에 있어 감정의 절제와 타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로 화합의 몫을 수시로 담당한 그였기에, 심적 아우라(Aura)에서 어둠의 그늘이 걷힌 밝음과 정직성이 묻어나고, 주위의 이들에게 뛰어난 식별력과 온유한 심사(心事)로 평온함을 안겨준 그의 품격은 못내 모남이 없다. 
  모쪼록 시창작의 주체는 시인뿐만 아니라, 엄격하고 폭넓은 면에서는 한 사람의 독자도 이에 포함되기에,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자신의 시편에 ‘즉물적, 전체적, 정의(情意)와 지성의 종합, 유물적, 구성적, 객관적 특성을 유추하는 업무에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또 하나 그의 시편을 통해 흥미로운 사실은 연작시 형태인 <줄>에서 입증되어지듯이 화자인 그 자신은, “오늘 그녀가 미음을 불러들였다/책갈피에서 날아간 문자들이/병실 창밖에 수혈을 했을까/가지마다 피어오르는 저 생명의솟구침/그녀의 링거 줄이 싱그럽게 춤춘다.(줄)”의 보기처럼 후기산업사회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현대시들은 삶의 일상에서 부대끼는 사물을 가 일층 여과하여 엄밀히 새로움을 표출해야 하기에, ‘삶의 업보(業報)랄까?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아니하고 새로운 변전을 탐색하는 행위는 끝내 경이로움과 지속되기에 이른다. 까닭에 주의 집중할 시적 현상이라면, 이마누엘 칸트가 제시하는 ‘순수 악(純粹 惡)’은 일상의 언어나 문법으로 그렇게 모호성을 토막 내고 파헤쳐 명쾌하게 해석할 수 없기에, 현대인의 내면인식에 정언명령식 순환어법을 이탈한 공포는 종종 위험성이 주어진다. 
  결론적으로 고뇌나 갈등 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안일한 창작행위는 시인의 도덕성에 관한 문제이지만, 불확실한 이 혼돈의 시간대에 그나마 영혼이 자유로운 푸른 생명의 바람으로 우리 곁에 자리하며 상처 입은 영혼을 따뜻한 가슴으로 치유(healing)하는데 고뇌하는 그만의 열정은 때로는 눈물겹다. 하여 그 자신의 다음 시편에서 시어의 이중성, 즉 개념이 선명하게 검증되지 않은 ‘노가리(명태의 어린새끼?, 노가리 깐다)’의 해석도 새삼 검토될 바이나, 일단 “치열했던 삶 가벼이 비우고 바다를 닮아가는 노가리 앞에서/치기어린 도피를 꿈꾸는 내 독설은 서서히 말라가고/비우지 못한 욕망의 편린은 허공으로 흩어진다.//창자 속까지 수분을 비워낸 마른 눈에서 난 왜 자꾸만 바다가 보이는 걸까/알콜로 마비된 가슴의 상처는 왜 자꾸만 몸통을 불리며 파도소리를 내는 걸까(노가리 앞에서)”라는 반문(反問)에 앞서, ‘알콜과 노가리, 선술집의 대치와 배경’을 연상 작용에 의해 세속적인 틀을 부수며 비우지 못한 욕망의 편린(片鱗)을 그나마 초연(超然)하게 그 자신의 의지로 고독하게 헤쳐나간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우리현대시문학사의 비중을 지닌 실체로 차별화된 정체성(inter-being)을 확고하게 구축해 줄 평자의 믿음과 기대감은 결코 배제할 수 없다. 
  비록 그 자신의 실체를 불꽃 튀게 살다간 시인으로 구명 짓지 않을지라도, 이 땅의 시인들이 진실로 미적주권을 상실했을 때 그것은 사회 현재적 갈등구조를 얽어매는 또 하나의 불행임에 견주어 그 또한 언어공해를 조장하는 매개요소임을 수긍하고 이를 실천궁행한 존재임은 응당 인정해도 지나치지 아니할 것이다. 앞서 조선조의 교산 허균(許筠)이「문설(文說)」에서  ‘시(詩)란, 도(道)이며 정(情)임’을 역설하였듯이  ‘물속에 놓여 있는 돌도 함부로 움직이면 그 물의 울음소리가 달라진다.’는 자연의 이법을 예감(叡感)하고 수락한 김영미 시인의 독자적인 시적 작위(作爲)는 어디까지나 삶의 현장에서 격앙된 어조나 언어유희(pun)로 시적 심리를 발화시키지 아니한, 혈흔(血痕)같은 시편은 「모던포엠 포커스」에 담아낸 시적 감응이기에, 한 사람의 독자인 이 땅의 우리가 기억에 각인시킬 일임은 거듭 강권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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