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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지문/조연향

언어의 조각사 2013. 10. 1. 10:23

붉은 지문   -조연향-

 

 

  지문 인식기에 내 지문이 비치지 않는다

  홀연히 사라진 소용돌이를 일으켜 찍고 또 찍으며

  폐허의 이유를 묻는다면,

  살 밖의 일들을 자꾸 살 속으로 밀어 넣거나 숨기려 했던 일

 

  끓어오르던 피를 잠재우듯

  한 줄기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 언덕 끝에서

  새끼손가락 비틀며 엄지로 한 번 더 결인했던, 너와의 약속이 무효가 되어 버린

 

  단풍나무 다섯 잎맥들이 노랗게 숨죽이고 풍랑을 그리던 그 자리,

  벼랑을 타 올라가는 나팔꽃 하나,

  오로라 불꽃이 광대무변하게 불타고 있던 자리,

 

  (여우를 잡아먹은 피 묻은 곰 발바닥을 들켜버릴까 봐, 내가 나의 기록을 몽땅 지워버린거지 나는 이제 완전범죄야 어느 검문에도 걸리지 않아)

 

  겨우 내내, 길쌈을 하시고, 바느질하시던 어머니의 지문을,

  오롯이 살빛 어둠으로 지어 올린 비단 같은 지문을

  나는 어느 낯선 길에서 잃어버리지 않았던들

  보일 듯 말 듯, 내 꿈 한 줄기는 거미줄을 덮고 영원히 잠복해 있으리라,

 

  밤과 낮을 비비듯,

  거짓과 진실을 비비듯,

  폐허의 꽃잎을 맞붙여 쓱쓱 비벼보는 사이,

 

  닳을 대로 닳은 채 살아가야 하는 내 얼굴과, 닿을 대로 닳은 내 마음 사이 적도(赤道) 하나 붉게 젖어서 울고 있다 한들,

내 무늬 고요히 잠복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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