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걱
박은형
개망초 흰 머릿수건 사이 여름 오후가 수북한
그 집은 가득 비어 있다
인기척에 반갑게 흘러내리는 적막의 주름
컴컴한 부엌으로 달려간 빛이
삐걱, 지장을 놓으며
눈썹처럼 엎드린 먼지를 깨운다
밥상을 마주했던 날들을 배웅한 징표일까
남은 것들로는 그림자도 세울 수 없는 회벽
그을음으로 본을 뜬 그늘 주걱 하나가 저기,
테 없는 액자처럼 걸려 있다
무쇠솥이며 부엌 바닥의 벙어리 주발들
눈이 침침한 채 아직 남은 밥 냄새, 만지작거린다
누군가와 마주앉아 먹던 모든 첫 밥에는
허밍처럼 수줍고 고슬한 기억이 들었을 것이다
선명한 그을음이 빚은 밥 냄새의 화석에서
뭉클한 식욕의 손잡이가 돋는다
멀리 수평의 여름 저녁이 이고 오는
고봉밥 한 그릇
산마루를 지나 평상으로 식구들 불러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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