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양파/손미

언어의 조각사 2013. 8. 26. 12:45

양파 /손미

 

그러니 이제 열쇠를 다오.

조금만 더 견디면 그곳에 도착한다.

마중 나오는 싹을 얇게 저며 이 얼굴에 쌓고,

그 아래 열쇠를 숨겨두길 바란다.

부화하는 열쇠 속에 비밀을 말하는 것은 올바른가?

이제 나를 들여보내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 발바닥으로 여기까지 오며 양파를 쥐고 기도했다.

그곳에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을 지나면 아무도 모르는 시냇물.

그 시냇물에서 죽을 수 있겠다.

양파는 첨벙첨범 시냇물을 건너 갈 것이다.

나는 때때로 양파에게 입을 그려준 뒤 얼싸안고 울고 싶었다.

흰 방이 꽉꽉 차 있는 양파를.

문을 열면 미로들. 무수한 줄과 길.

문 앞에 앉아 양파가 익기만 기다리고 싶다.

그것 밖에는 하고 싶은 일이 없다.

나는 때때로 흰 방을 쪼개고 열어

그 속에 조용히 비가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 비밀을 이 속에 감춰두는 건 올바른가.

꽉꽉 찬 보따리를 양손에 쥐고 조금만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내 집.

그러니 이제 그만 나를 들여보내다오.

잃어버린 내 열쇠를 돌려다오.

 

- 시와 사상, 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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