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문학의 향기(공부방)

목소리, 그 목마름의 끝에 서서

언어의 조각사 2013. 2. 19. 16:02

 

목소리, 그 목마름의 끝에 서서

 

김혁

 

1. 목마름의 끝에서

 

물건은 밖에서 두드리면 되돌아오는 소리의 질감을 통해 그 안의 사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탁한 소리가 돌아오면 안은 차 있는 것이고, 맑고 높은 소리가 울릴수록 그 속은 더욱 비어 있는 법이다(월터 옹,『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사람을 밖에서 두드린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그의 사정이 어떠냐고 직접 묻는 일이다. 사람은 자신을 지키는데 있어서만큼은 교활하여, 누군가 밖에서 두드린다고 해서 자신의 안을 순순히 허락하는 법은 없다.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소리를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가령 맨발로 압정을 밟으면 그 순간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올 것이다. 이 때의 비명은 고통스러운 마음의 표상이라고 설명되어서는 안된다. 장자의 바람 소리가 그렇듯 그 목소리는 그의 존재와 둘이 아니다. 그래도 그것은 참을 만한 때의 일이다. 철심이 너무 깊이 박혀 고통이 뼈를 뚫으면, 반 쯤 치밀었던 뱃 속의 소리도 목구멍으로 돌아와 되삼켜지고 만다. 이것이 사람의 소리가 물건의 소리와 다른 점이다.

그래서 까마득히 먼 옛날, 정부에서는 악부(樂府)라는 관청을 두어 민간의 노래들을 떨어진 이삭을 줍듯 채집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물어서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연의 목소리를 찾아 자기 정치를 비추어보고자 한 때문이다. 이것은 현명한 일이다. 이때 거울은 나의 바깥에 있다. 따라서 비추어진 것도 역시 바깥에 있다.

만일 거울이 마음을 향하고 있다면, 그곳에 어린 상은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다. 개가 달을 향해 짖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그때가 개가 짖고 싶어했을 때라고 속단하는 것은 결코 신중치 못하다. 현실은 엄연히 밖에 존재한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보는 사람의 독선이기 십상이다. 달이 떴기 때문에 개가 짖는 것이라고 우선 믿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사랑을, 그것도 고통으로 차오르는 사랑의 노래는 누군가의 독선을 무참히 무너뜨린다.

 

 

 태풍주의보 끝난 어판장

고단한 양식을 미행했던 배들이

지나온 미열을 붙들고 있다.

아침 햇살에 걸린 여자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뭔가 체한 듯,

바다와 그녀는 서로 끔찍이 닮아서 고단해 보인다.

매일같이 쌓이는 생선들의 산더미를 줄이는 사이

세월이 갔고 청춘이 금지되었다

어깨로 쌓이는 내항의 잔물결을 삭이는 사이

파도 너머 *집어등의 웅크린 시간 속에

그을려 왔다

잘게 썬 취기와 취기 사이

낯선 행인의 이야기 속에서

봄은 무시로 누군가의 소문이 되어 사라졌지만

조금도 줄지 않는 세월의 주름들

오늘 그녀가 또 몇무리의 사연들 속에서

하루치의 고단한 양식을 좌판 위에 펼치고 있다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 전대 속의 은빛 무게를

낡은 지폐로 환산하며 저녁이 되어 가는 일몰의 어귀를

싸늘하게 뎁히고 있다

 

누군가 칠석의 밤이 가까운지

견우와 직녀를 한잔의 술로 건네어주는 한 때

주문진 k아줌마, 오래 전 땅에 묻은 한 사내의

칠성판이라도 떠오른 듯

지상의 긴 한숨을 저녁노을 속에 섞는다

 

*집어등 : 오징어를 잡기 위해 밝히는 등불 (주문진 항구2 - k아줌마-)

 

상대방이 겪는 괴로움은 그 내용이 우리에게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형식만이 간신히 전해질 뿐이다. 시인에게 혹은 그녀에게 바다는 여행객의 시선에 문득 붙들린 그런 풍경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일상의 고단함이라고 간단히 말해서는 안된다. “매일같이 쌓이는 생선들의 산더미를 줄이는 사이 세월이 갔고 청춘이 금지”되었다는 것이나, “또 몇무리의 사연들 속에서 하루치의 고단한 양식을 좌판 위에 펼치고 있다”거나, 혹은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 전대 속의 은빛 무게를/ 낡은 지폐로 환산하며 저녁이 되어 가는 일몰의 어귀를/ 싸늘하게 뎁히고 있다.”는 것은 그녀의 일상에 대한 시인의 진술이다. 이것만으로 시인이 그녀를 가리켰다면, 이 시가 특별히 주목받을 이유는 없다. 이런 생활의 고난쯤은 누구라고 껴안고 살아갈법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녀의 안으로 한발 더 다가가 그녀의 목소리를 헤아리고자 하였다. 시인은 그녀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시선의 안쪽에 고인 목마름을 들여다보고 있다. “오래 전 땅에 묻은 한 사내의/ 칠성판이라도 떠오른 듯/ 지상의 긴 한숨을 저녁노을 속에 섞는다.”

무게에 무게를 더하며 집요하게 가라앉아 인간의 숙명에 이르려는 시인의 진지함은 이곳에서 예측되는 모든 표상의 가벼움을 이겨내고 있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은 오지 않았다.

빨간 맆스틱을 바른 애인도 늦도록 오지 않았다.

기차가 지날 때마다

그해 여름의 마지막 꽃무늬 치마를

저녁의 차창에 펼쳐보이던 여인

기다림의 시간은 직선으로 흘러갔다.

나뭇잎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알아버린 식은 커피맛은

어느 저녁의 구름이 흘리고 간 충고일까

이따금씩 중년의 사내 하나

붉은 노을을 헤집으며 서울을 부르곤 했지만

그런 밤엔 어떠한 약초내음도 흘러들지 않았다

가을이 지나면 제 안의 마디들을

무딘 묵음으로 끌어당기던 선로들

어디선가 산짐승 몇 마리

마을의 비밀이라도 기웃거리듯

오두막 몇채 오싹, 밝혀주었고

나는 오도가도 못할 소름들만 모아

역사 근처 더운 술집을 들르곤 했다(<인연 2 -정선역->)

 

윤병주가 인간을 보는 눈은 원형적이다. 고통의 회돌이는 인간의 밑바닥에서 남김없이 모든 것을 걸러내고 있다. 이 고통은 형이상학적인 초월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곳에 있는 사람이 짊어져야 하는 상실의 모진 견딤이다. 그래서 그 상실은 채워지기도 하고, 또는 비워지기도 한다.

이 풍경에는 “제 안의 마디들을/ 무딘 묵음으로 끌어당기던 선로들”이 있고, “마을의 비밀이라도 기웃거리듯” 하는 “산짐승 몇 마리”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안의 “나는 오도가도 못할 소름들만 모아/ 역사 근처 더운 술집을 들르곤 했다.” 의미의 시계추가 멈추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이런 풍경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것을 권태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허무라고 이야기하여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의미의 몸짓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말들로 이 상황을 표현하는 것은 모두 부적당하다.

“나”는 이미지와 표상의 페이지를 이미 넘어서고 있다. 그는 욕망의 이마고에 이미 붙들린 포로이다. 그녀의 자리는 있으면 좋고, 없으면 쓸쓸할 그런 자리가 아니었다. 설마 그녀의 부재가 나의 부재로 이어질 줄이야. 이때 나는 한 마리 짐승이 된다. 그녀가 사라진 그 자리에서 나는 사라지고 짐승의 밑 모를 목마름만이 남는다.

 

사람들이 쾌락을 들출 때마다 낙엽들이 졌다

한 여자가 무기로 사용했던 각서조차

내 안의 질병이 되지 못할 때

밤열차는 떠나갔다

불빛이 꺼지고 나면

눅눅한 행방들 낡은 물체처럼 후줄근해졌다

나는 지친 여관 의자에 앉아 그녀가 주고 간

실패한 사랑을 읽었다.

주술이 되지 않는 것들은 없었다

늦은 예감이라도 완성하듯

봄이 되면 목련꽃들이 지나쳤다

비가 다시 구름들의 생애를 들추지 못하는 건

모두가 다 그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슬픈 내막을 들어 줄 밤들은 오지 않았다

누군가 켜 놨는지 철지난 기척이

꽃무늬 벽지로 쌓이는 날이면

나는 한낮의 태양을 끄고서

좀 더 황홀한 안쪽, 그녀가 머물던

언젠가의 신열 속을 서성거리곤 했다(<인연3 -상처->)

 

그녀가 있던 곳은 나의 안쪽이다. 그 안쪽은 “한낮의 태양”보다 “더 황홀한 안쪽”이다. 그녀가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이다. “밤 열차”와 “여관 의자”, “목련꽃”과 “꽃무늬 벽지”들은 그의 황홀을 밖에서 완성하고 있다. 윤병주가 이런 대조의 유창한 시어들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절망적일 그 순간에 부려놓을 수 있었다는 것에 한편으로 외경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2. 인연과 목소리

 

윤병주의 시를 읽으면 인생의 모든 풍상이 한 곳에 모였다가 이내 흩어지는 환상을 보게 된다. 그 자리에서 사물들은 과장을 거부하며 제 자리로 들어 박힌다. 그의 시에는 지식인의 치기어린 과장이 없어서 좋다. 책을 쫓는 사람들이 사물의 질서들에 대해 무어라 이야기하기 이전에 그것들은 그곳에 있었다. 이것들을 발견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것들이 그곳에 있다고 자부하는 것은 사실상 지식인의 못난 어줍잖음에 불과하다. 태안의 마애삼존불은 어느 지식인의 눈이 닿기 이전에 그곳에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애 못 낳는 어느 여인의 애달픈 목소리를 들어주고 있었다.

그의 시는 ‘풍자냐, 해탈이냐’ 혹은 ‘권태냐, 혁명이냐’, 지식인이 갖는 양자택일의 설익은 결단을 기도하지 않는다. 칼 날을 세워 익지 않은 태아를 뱃 속에서 직접 꺼내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그 대신 시인은 상대의 목소리를 차분히 응시할 줄 안다. 그의 시는 목소리에 얽힌 모든 연역을 모으고 다시 풀어내는 끝없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다음 시는 윤병주의 이 같은 시학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지나온 소리들이 벽에 걸려 있다.

끌어내려다 다시 풀려지는 낯선 소리들처럼

나를 뒤따라오던 꽃들의 목록도 태엽처럼

떨구어져 있다.

참소리 박물관 이 곳의 소리들은 기억의 흔적들

누구든 귀를 버리지 않으면 소리들의 안쪽으로

들어 갈 수 없다.

한낮에도 환청처럼 깨어나는 추억들

모든 추억들에겐 먼지의 날들이 얹혀져 있다.

풀썩 열리지 않는 성대를 갖고 있고,

툭툭 어깨부터 털어내야 되살아나는

희미한 숨결이 있다.

쓴잔을 마셔온 추억들

늦은 밤을 몽롱한 속도로 맴돌던 늙은 가수의 저음과

혼미한 동요에도 제 추억의 목록을 잃고 말던

불안한 무게의 나날들이 있었다.

이제는 영영 소리들의 미이라가 될 저 불길한 연대기들

참소리 박물관 안쪽

측음기들의 모서리로 빠져 나오며

나는 아직도 헤집지 못한 그 시절의 유행들을

혓속 깊이 감아내며

햇살에 길들여진 신생의 소음들 속으로

낡은 귀를 부려 놓는다.

 

*강릉 경포대에 위치한 참소리 박물관 (<참소리 박물관>)

 

위의 시는 조주화상이 ‘뜰 앞의 잣나무이다.’고 답한 연유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이 답은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는 곳으로 돌아간다. 묻는 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물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질문이 수백년을 거듭해왔던 죽은 물음인 것만은 틀림없다. 죽은 물음에는 살리는 답이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는 물음을 듣지 말아야 하며, 다만 울림으로 답해야 할 뿐이다.

박물관에 걸린 권태로운 소리통들에 대해 시인은 답한다. “누구든 귀를 버리지 않으면/ 소리들의 안쪽으로 들어 갈 수 없다.” “소리의 안쪽”은 소리가 존재하는 자리이다. 그 소리들이 사람을 통과하였던 그 순간,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의 목소리가 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귀를 기울이려 하면 할수록 존재의 자리를 울리는 목소리는 숨는다. 그 사라져버린 소리를 뒤져야 할 곳은 오직 추억뿐이다. 내 기억을 애써 토해내려 하는 사이 그 소리들은 멈춘다. 추억은 기억과는 다르다. 추억은 나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분비가 아니다. 그것들은 도래하는 신과 같이 자신의 오랜 곡절을 갖는다.

그래서 “한낮에도 환청처럼 깨어나는 추억들/ 모든 추억들에겐 먼지의 날들이 얹혀져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그 추억들은 샘이 솟듯 자신의 삶에 의지를 부여하고 의미를 채운다. 그런데 그 의지가 의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난관이 있다. 그것들에는 “풀썩 열리지 않는 성대를 갖고 있고/ 툭툭 어깨부터 털어내야 되살아나는/ 희미한 숨결이 있”다.

시가 시인에게 붙잡힌 이미지로만 채워지지 말아야 할 근거는 충분하다. 이미지는 자신이 문득 이끌어온 환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미지들이 석고처럼 굳어 버릴 때, 그것들은 자칫 “영영 소리들의 미이라가 될 저 불길한 연대기”가 될 수 있다. 왜 소리의 이미지를 목소리로 걸러내야 하는지 이 시인에게는 매우 명백하다. “참소리 박물관 안쪽/ 측음기들의 모서리로 빠져 나오며/ 나는 아직도 헤집지 못한 그 시절의 유행들을/ 혓속 깊이 감아내며/ 햇살에 길들여진 신생의 소음들 속으로/ 낡은 귀를 부려 놓는다.” 그에게 추억은, 그 기억들은 단순히 쓸쓸함의 징표로만 남아있지 않다. 언제나 이해를 거쳐 솟아나오는 새로운 것이어야 하며, 그래서 자기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그래서 그로부터 의지를 얻게 되는 내면의 되새김이어야 한다.

목소리는 오랫동안 쌓아왔던 자기 곡절과 연관되어 있다. 소리가 낡은 귀의 뒤쪽으로부터 전해져 와서 자신의 내면에 쌓여있는 목소리들을 일깨워낸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어김없이 나의 동백아가씨를 현재 이 자리에 불러들인다. 부르는 것은 소리이지만 불러낸 것은 추억이고, 또 목소리이다. 소리가 현상의 연대기에 놓여 있다면 목소리는 그 연대기 바깥에 있다. 목소리는 결코 연속적이지 않으며,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도둑처럼 찾아온다. 그것이 온다는 것은 알지만 누구도 언제 오는지 확답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목화꽃 필 때 누님은

낡은 성경책을 들고

목사의 길을 떠났다

운명이 가까워질 때마다

독경 속으로 떠나던 작은 형

대처승이 된다는 건

담장 위 고양이처럼 한낮에 조는 법을

배우는 것일지도 몰라

그러나 형은 좀처럼 부처를 버리지 못한 채

여자 속에서 살아갔다

여자를 버리지 못한 채

여자 속에서 늙어갔다

몇번의 장마가 지나고

내가 강 건너의 계절에 눈을 떴을 때

벽오동 하나 제 안의 불을 끄고서

보랏빛 장롱 속으로 들어가는 풍경만은

지금도, 나무관세음보살(<인연4 -가족사->)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의 안, 저 밑바닥에서 문득 떠올라 자기 속을 한껏 헤집다가 가라앉는 것이 있다. 가족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가족의 추억이다. 그에게는 누님이 있고, 형이 있고, 또 어머니가 있다. 그 중 형의 연대기는 그의 삶에 가장 치명적이다. 형의 오랜 부재 동안 가족의 그리움은 그의 현재가 되었다. “좀처럼 부처를 버리지 못한 채/ 여자 속에서 살아갔다/ 여자를 버리지 못한 채/ 여자 속에서 늙어갔”던 그의 형은 그에게 영원한 수수께끼였다.

시인은 이 수수께끼를 이미 풀 나이가 되었다.

 

이상한 소문들이

밤마다 집으로 흘러들었다.

처마 옆엔 남쪽으로 간 작은형 모습이

근심으로 등에 걸리곤 했다.

풀들은 자라지 못할 불빛이 필요했다.

남쪽의 바람을 붙잡고 내 유년은

긴 의문에 빠져들었다.

빚더미에 쫓겨 출가를 해야 했을까

형이 떠난 봄날

어머니의 근심에 풀들은 자라지 못했다.

바람은 아무것도 흔들지 못했다.

개가 짖을 때마다 바람은 도둑처럼 흘러들었다.

북극성은 늘 거기에 있었다.

검은 암실 같은 날들이 명명하게 흘렀다.

나는 남쪽 바람에 실려온 절집 이야기를 추궁하며

의문의 생을 뒤적였지만

희미한 행선지를 지나치기 일쑤였다.

이듬해가 되고 몇 개의 버들강아지를 건너

형이 돌아왔을 때

내 나이 쉬흔이 가까워 있었고

뒤 켠의 어머니

처마 끝에 낙수물 소리가 염주알 같은지

몇 번이고 이승의 인연들을 중얼거리곤 했다( <인연 1 -어머니와 형->)

 

관세음보살은 목소리를 듣는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사람들이 “나무관세음보살”을 욀 리가 없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결국 인연의 소리이다. 그가 자식이 아니었다면 어머니의 목소리는 없다. 그가 형이 아니었다면 그런 목소리가 뱃 속에 가득찰 리가 없다. 목소리가 가슴에 가득차는 것은 어느 한 때 불어오는 바람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피리의 구멍처럼 몸이 썪어 만든 연대기의 끝에서 이루어진다. 이 사실을 안다면 그가 이 추억을 시를 통해 풍경으로 펼쳐지는 현재의 역사로 고백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연의 매듭을 풀지 않으면 사랑은 계속 순탄치 못할 것이다. “지금도, 나무관세음보살”이다.

 

3. 사랑을 순탄케 하라

 

사랑을 순탄케 하기 위해 이제 시인에게 남은 일은 꼭꼭 매여진 지난 인연의 낡은 매듭을 푸는 일이다. 그것은 직접 풀 수 없다. 그 반대쪽으로 가서 또 다른 인연의 매듭을 조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서릿바람 풀어 놓은 골짜기 나뭇잎들

색채는 점점 짙어져 내려오고

여름을 지나온 새들의 소리는 고요한데

산밭에 걸린 아내는 낮달처럼 늙어갔다.

산속의 중심으로 보름달이 뜨면

아내는 아기가 생기길 원했지만

아기는 생기질 않았다.

 

나는 서리 맞은 배추밭에 멍하니 서서

날아가는 나비들을 한참 바라보았다.(<오대산 1 - 가을->)

 

누구나 그렇듯 나이가 들수록 그가 아내와 맺는 관계는 숙명일 수밖에 없다. 모든 남편들에게 아내는 그가 세상과 맺는 언약의 징표다. 그와 아내 사이에서 태어날 아기는 숙명의 증거라고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증거가 없다고 그가 세상과 맺는 언약을 배신할 수는 없다.

“산밭에 걸린 아내”가 “낮달처럼 늙어”가는 장면이 이 시인의 여린 시야에 걸린다. 이 때 비좁은 사랑을 넘어 인생의 깊은 숙명을 노래할 수 있는 목소리를 시인은 얻게 된다. 이 목소리를 시인은 “서리 맞은 배추밭에 멍하니 서서/ 날아가는 나비들을 한참 바라”보는 시야 속에 묻어둔다.

이러한 시야에는 사실상 두보의 따뜻함이 묻어있다. 여기에는 타인의 고뇌에 애써 이르려는 지식인의 과장된 몸짓이 없어서 좋다. 백거이의 농부에 대한 거리감 둔 애정이 한편으로 존중되면서도,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그런 과장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몇 마디 동정으로 그 굴레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단 말인가? 타인에 대한 애정을 과장하는 순간, 오히려 그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배반하고자 준비하는 것이다. 현실이란 가능하다면 견디고, 그것도 안되면 해탈로 가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두보가 위대한 시인으로 남았던 것은 이 비결을 터득하였던 덕분이다.

시인의 ‘그 자리’에는 아내가 있었다. 그녀는 “가장 쓸쓸한 자리에서 따뜻한 나물국을 끓이며/ 나를 기다리”는 그 자리에 있다. 이 자리는 그녀의 것이지만, 그의 것이기도 하다. “가장 깊이 숨어야만 빛이 되던 그 상처를/ 봄날이 다 가도록 새”길 수 있는 오직 남은 한 자리이다. 그 자리 덕택에 그는 “누군가를 떠올리다가 /나를 잊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오래 된 위로일까”라고 노래 부를 수 있는 것이다.”고 말하며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이다(<오대산2 - 아내->).

인간의 굴레를 눈여겨보지 않고 세상을 머리로 지어낼 수 있다고 믿는 건축가들은 너무나 위태롭다. 신의 자리를 넘보는 혁명가들에 대해 시인은 필시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작은 위안이다. 그는 “먼저 술병을 들었고/ 내 인생의 마지막 잔을 받아들 듯/ 기억 저쪽의 내가 이승의 따듯한 한 때를/ 무심코 비워내고 있었다.”

인생의 의미를 더 이상 경전으로 풀지 않으려 하는 것만으로도 사실상 이런 평화에 보탬이 되는 것이다. 허무한 시간 속에서 인간은 잊혀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전쟁을 벌여왔던가? 이 전쟁을 종식시킬 힘이 결국 허무에 있다는 것을,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을 윤시인은 결코 상투적이지 않은 호흡으로 이렇게 풀어낸다.

 

봄이 왔다

햇살들이 왔고

산역을 마친 봄꿩들의 짝짓기 소리가 내려왔다

나는 비탈진 산밭이 붉은 유전자로 깨어날

늦봄의 산삼 씨앗들을 떠올리며

오래 전 멈춘 한낮의 침침한 마루 속 벽시계를

눈이 뚫어져라 들여다보곤 했다(<봄 2 -분지의 날들->)

 

 

윤병주는 자신의 불임을 또 다른 씨앗으로 옮길 줄 안다. 그는 “산역을 마친 봄꿩들의 짝짓기 소리”를 “늦봄의 산삼 씨앗”으로 옮겨서 꿈꿀 줄 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봄”이 왔다고, “햇살”이 왔다고 하면 더욱 믿음이 가는 이유이다. 그가 들어가려는 빛나는 세계는 잔혹도, 풍자도, 역설도 없다. 대비의 한쪽에서 길어 올려진 구원의 환상이 아니다. 여기에 있고, 현재에 있는 “오래 전 멈춘 한낮의 침침한 마루 속 벽시계”에 있는 명상이다. 그런 세계에 그가 초대한다면 그것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의 노래는 우리의 사랑이 결코 순탄치 않음을 보여준다. 더 위대한 것은 그것을 벗어나는 데 비결이 있음도 보여준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그것을 사랑의 노래로만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노래를 부르는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괴로움, 비탄, 원망이 연인을 핑계 삼아, 그 그리움을 빌미삼아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세상에 비극이 잠시라도 멈추지 않는다면 그리움의 소리도 더욱 비통해 질 것이다. 그 목소리는 상처가 되어 새로운 씨로 맺고 있다. 위로부터 부는 바람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 바람의 임무는 우리의 사랑을, 다시 말해 우리가 부르는 사랑의 노래를 순탄케 하면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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