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문학의 향기(공부방)

박경원시인의 시세계

언어의 조각사 2013. 3. 18. 09:42

문신 / 박경원

 

러닝셔츠 너머

박스를 나르는 사내의 어깨 근처가 심상치 않다

성깔 있게 붉어진 근육과 근육 사이

하트 모양에 담긴 사랑이란 글씨가 큐피트의 화살을

맞고서 부르르 떨고 있다

얹힌 짐짝에 눌려 그 사랑 다시는 추억할 수 없을 듯

그 사내 과거 속 사랑을 폭력처럼 혹사하고 있다

천천히 뭉쳐지다가 한순간 꿈틀댄다

비틀비틀 중심을 잡다가 우지끈 뒤틀린다

새겨진 박스 자국을 툭툭 털며

노끈에 눌린, 깨진 사랑의 부위를 몇 번이고 어루만진다

살 속 깊이 묻어야 할 추억의 영수증이라도 되듯이

유독 발달된 상체를 그 좁은 하트 속으로 구긴다

벌겋고 두드러진

사랑의 표피층에 물집이 고이기 시작한다

아기의 사타구니에 번진 습진처럼 붉은 연꽃이 핀다

곧 불타버릴 것 같은 저 사랑, 혹은 무늬만 사랑 아닐까

 

 

환절기 / 박경원

 

간헐적으로 중국 하늘이 떠내려왔다

모택동이 날아왔고 등소평의 키 작은 발자국이

이곳저곳 풀썩, 찍혔다

사막과 건조한 길들이 잘게 부스러진 채 공중 가까이

흙의 장막을 쳤다

구름들, 꽃들의 북상이 흙물에 얼룩졌고

때론 쥐오줌 같은 봄비가 아파트 낡은 배수구를 통과해

빠르게 잊혀져 갔다

신문들의 한쪽 면이 마스크를 뒤집어썼다

노란 색 차에 실려온 아이들이 대륙의 중력 아래서

마음껏 늙어가고 있다

 

뒤돌아서자

지난해 묻은 삼월의 달력을 들쓰고 올라온 하얀 거름

몇 줌,

목련이 되어 호로록 빛나고 있었다

 

점이지역 / 박경원

 

일들은 땅 위에서 숨을 거둔다

느슨한 강물 너머 모래톱으로 빛나는 민물의 끝

앞에서 단층 배후에서 반지하의 바닷가 술집 근처

육지 쪽으로 싸늘한 몸 엎어놓은 채

몇 걸음 뒤에서 중단된 구두엔 아직도 마르지 않은

바다가 있다

옛사랑의 희미한 물결이 묻어 있다

물 위를 떠다니다가 익사한 그날이 되어 옛 남자와 재회한

몇 방울의 짜디짠 날짜가 있다

추측을 뒷받침하려던 바로 어제,

비바람 심하던 지난 새벽으로 결론을 모아야

그의 죽음은 쉽게 완성된다

폭력이 할퀸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기억의 어두운 모퉁이를 헤맨 흔적만이

흠씬 젖혀진 얼굴 표정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야만 어두웠던 지난 몇 년 빈 술병처럼 뒤뚱거리던

그의 날들 암갈색 혐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바다를 향해 무거운 발길 이끌고 온 몇 나머지 추억을

뒤적일 수 있다

지난달에도 비슷한 죽음이 있었다고 결말을 흐리는

상인의 입에는 게걸음 같은 무료함이 들어앉아 있다

누군가 해안선 저쪽으로 기지개를 날렸고 얼마 안 있어

묽은 어둠이 찾아왔다

 

 

음지의 날들 / 박경원

 

나무 밑, 버섯처럼 음습한 그늘 속에서 노인들이 살고 있다

몸의 일부로는 끊임없이 어두운 양분을 빨아들이는지

가부좌에 결박된 채 하루 반나절을 곰곰이 삭힌다

햇살 저쪽 찌는 듯한 젊음들을 넘겨보며

알 듯 모를 듯한 체념을 입 속 깊이 솎아낸다

한때 자신들 삶을 뒤흔들었던 경전도 시들해진 지 오래다

무시로 잠입하여 길흉을 예고해 주던 몇 가닥 손금들도

말라붙은 지 이미 오래다

가끔씩 넣어지는 요구르트처럼

살과 살 사이가 쪼로록 비워지는 허망한 갈증을 느끼며

젊은 한 시절이 머무는 뜨거운 건물 저쪽에 뿌리 없는 관심을 던질 뿐

비가 내리고

더러는 생사의 소식이 가까운 맨홀을 통해 빠르게 사라지는 동안에도

그들은 하루에 한번 씩만 젖다가, 마른다

몇 줌 습도, 주름살 속 망각의 희미한 양분이라도 남겨진 한

썩은 가부좌에 결박되어 죽음의 층을 버섯처럼 쌓아올리는

나무 밑 한때

한 노인이 낡은 인대를 꺼내어 무릎과 무릎을 맞바꾸고 있다

 

 

식물의 장례 2 / 박경원

 

그는 오랫동안 식물로 살았다

푸른 캡슐 속에서 저장된 기억을 소비하며 존재의 안쪽만 지켰다

자신이 누구냐고, 기억하냐고

다가온 움직임들 생각의 바깥을 배회하곤 쓸쓸한 무게로 사라졌다

몸 속 날짜들이 낮게 수런거린다

가끔씩은 육중한 움직임에 실린 듯

검붉은 식욕을 이끌고서 야광 같은 공포가 지나쳤다

소가 접근한 듯한

그 억센 저승의 힘으로부터 몸을 지켜내며 기억의 체적을 푸르게 움츠려 보는 일

그런 날

하루치의 몸속으론 맑고 선명한 방울소리가 한 무리의 걸음에 얹혀서 아주 느리게 멀어지곤 했고,

마치 상여처럼

 

식물의 장례 3 / 박경원

 

풀을 쫓는다, 바람의 방향을 움켜쥐고서 풀을 쫓는다

마을을 숨기고 청명 때의 사연들을 숨기는, 그곳으로

낫을 밀면서 간다

깊어질수록 무뎌지는 기억의 날을 애써 일으키며 지상에서의

마지막 장소를 조금씩 좁힌다

삶이란 무엇이겠는가

겨우내 지켜야 할 씨앗과 족보들

웅성거림이 내 안 유전자들을 툭툭 비집는다

유전의 희미한 심지 돋우던 등잔 밑 꺼먹한 대화가 튕겨져 나오고

오래도록

마음 속 잡초만 뜯던 어느 해 사랑채 풍경이 기억의 날을

무너뜨리며 뛰쳐나온다

어느덧 원형의 추억 속으로 내몰린 날벌레들의 춤이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파랗게 빛난다

그곳,

눈물의 순서에 따라 어느 하루 마을에서의 풍습을 닫고 들어간

무덤 하나 드러난다

 

 

나비와 잠 /박경원

 

 

정육점 안으로 나비가 날아든다

날개 가득 노란 잠을 묻히고 냉장고 밖 붉은 살덩이 위

전자 저울대 위, 봄의 무료함이 닿는 곳마다

물결 같은 너울 비행을 한다

앉는다 서늘하게 언 삼겹살을 붉게 핀 꽃밭으로 착각하며

그 착각을 꽉 닫고서 감촉과 감촉을 살풋 접는다

의자 위 날짜 지난 신문은 한 십 분 쯤 곤한 잠에 취해 있다

사내의 코고는 소리가 다급해 질 때마다

살갑게 묻어 있는 활자들 부르르 흔들린다

마치 제 똥에 추방당하는 파리의 익살스런 몸짓처럼

채식주의자처럼 가볍게 뜬 나비가 다시금 봄의 꽃밭을 난다

잘게 부스러지는 냉동실 소음을 가로질러

활자들의 고단한 언덕을 너울너울 가로질러

저울대 위에 사뿐 오른다

전자 게시판에 기록된 나비의 값이 순간, 오 원을 가리켰고

입 안에서는 잠의 가루들이 풀썩 날렸다

 

 

이월 / 박경원

 

잘린 나무속엔 추억들의 위치가 있다

누군가 화려한 일생을 꿈꾸다 떠난 몹시 뒤틀린 흔적이 있다

어둡고 고단한 안쪽에서 오직 유일한 방향, 한줌한줌

미량의 날들을 밀쳐냈을 습기 찬 사연이 스며있다

늦은 오후

도막난 나무에게선 바로 그 냄새가 난다

추억들은 높지 않은 곳에서 구부러지기 시작하였다

언젠가 서쪽으로 낸 창틀 무늬를 떠올리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소낙비에 흠씬 젖던 새벽녘과

커피 내음 가득한 이야기 속, 간간히 이어지던 턴테이블의 먼지 낀

연주곡도 둘둘 말려있다

추억의 용도가 정해지자 세상의 서쪽들과 오솔길 방향은

목수의 손을 떠나 재빨리 잠적한다

투박한 발길들이 구름처럼 넘어와서는 라면 끓는 소리로 잠시 머물곤 낮은 문지방을 쓸쓸히 떠난다

집의 안쪽 모서리가 쇠잔해지기 시작하고 건너편 숲이

한겨울 태양을 허공 가장자리로 밀쳐놓는다

이마 깊이 새겨진 나뭇결을 짚어가다가 한 노인이

호흡을 떨어뜨린다 그의 생은 지난 밤 사과 반쪽에 삼켜지다가

완강한 치아 자국에 떠밀리듯 새벽 한켠에 버려졌었다

오전 열 시가 되자

사람들 몇 소독 냄새 가득한 나무를 빠져나와 어느

신원을 알 수 없는 신문지 속으로 부스럭, 깃들고 있다

 

식물의 장례 1 / 박경원

 

그곳에는 언제부턴가 풀들의 풍습이 들어찼다

곡선의 사연을 가볍게 따돌리며 씀바귀 질경이, 희미한 이름들이 집의 안쪽을 점령한다

인두겁이 종적을 감춘, 안은 어둡다

더운 한낮에도 심호흡 몇 번 골라내곤 여름은 씨가 마른다

어둡던 기억들이 오랫동안 식물을 뒤집어쓰고

오촌당숙 초야에 묻혀 지낸 먼 친척의 생애가 음지의 안락을 조용히 음미한다

곳집, 풍습이 닫히고 마을이 닫힌 그 안은 푸른 것들의 장지다

마을 그림자가 끊어지고

사람들 긴 슬픔으로 걸어 나오지 못하자

몇 개의 혈압 오랜 기침 부스러기들 더는 찾아들지 않는다

발길들이란 오래전부터 그런 것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풍습을 멜 힘이 사라지면 풍습에 뒤덮이게 마련이다

질긴 어깨 끈 요령의 금속성 후각도 이젠 저승의 입구를 놓친지 오래다

오늘은

좁은 그 위를 오후 17시의 풀빛을 메고서 저녁 논두렁이 가볍게 돌아 나가고 있다

 

 

구름의 노래 56 / 박경원

 

설탕을 뿌려야 혀에 잘 녹는 구름이 있었다

연기처럼 휘말리며 나의 유년을 뭉쳐주던

구름들이 있었다

설탕을 뿌려야 마술을 가르쳐 주던 구름들,

나의 왼손에 쥐어졌다 오른 손으로 옮겨지는 사이

녹아버리던

그 옛날의 구름사탕이 있었다

 

공기의 내면 / 박경원

 

1

 

한낮의 공기들이 풀밭 한가운데서 둥근 풍선을 분다

오전 한때 꽃망울들이 더위를 차단하기 전

맛있게 씹던 물컹한 냄새를 연실 부풀리고 있다

잔뜩 삼킨 햇살에 풀 밑 벌레알이 툭, 열릴 때까지

서쪽 하늘이 성경책처럼 붉은 갈피에 싸일 때까지

공기들

밤새 예리해진 모서리를 없애며 풍선 하나씩 분다

 

2

 

주인 없는 집이 한두 채 늘어나면서 멀찍이 떨어진 집들

언제부턴가 연기 대신 불길한 추억 하나씩 피워올린다

오솔길은 저녁보다 빨리 끊어지고

그 집 가까워질수록 몸 안 호흡마저 싹 빠지는 듯한

그 알 수 없는 피곤에

다시 눈을 떴을 땐 깨진 창과 차갑게 식은 문들의 손잡이와

얼핏 유리 조각에 날아갔을 들녘의 풍경 몇 장 방바닥에 뒹굴고 있다

그리고 알게 된다

한낮이 되어도 먼지를 털지 않는 공기들의 푸릇한 독기와

낡은 불빛 아래 자연의 법칙을 해석해 주던

풀씨들의 외로운 문장, 이젠 점자책처럼 더듬어야 읽혀지는

공기의 싸늘한 족보까지 샅샅이 알게 된다

오후가 되고 다시 저녁

밥짓는 냄새를 그리워하는 그 오래된 공복감에

내가 동그랗게 갇힐 때까지 공기들은 이곳에 깊이 웅크리고 있는

추억의 예리한 모서리란 사실을.

 

가슴 / 박경원

 

빗장뼈 아래, 힘겹게 모여 있던 호흡은

엑스-레이 몇 장에 불편 섞인 응어리를 드러낼 것이다

그의 삶은 지금껏 한 번도 찰칵,

정밀한 소리와 함께 다음 감정으로 넘어간 적이 없다

호흡 속에서 내심의 뼈를 추려내는 일

엉겨 붙은 담배 찌꺼기와 누런 우울함을 포착하기 위해

한동안은 숨을 들이마신 채

도시의 한켠이라도 삼킨 듯 참고 견뎌야 한다

뜨겁고 차가운 느낌의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내어

흉곽 속 나무 뿌리가 얼마만큼 시들었는지, 그러나

그는 자신 속 나무 뿌리가 흡연에 숨겨질 때

더 곧고 싱싱함을 누구보다 잘 안다

조금만 더 참고 계세요, 찰칵

옆방 재떨이에 비벼 끈 남자의 목소리가 한결 상쾌하다

또 한 장의 삶이 무채색으로 인화되는 소리를

애써 허용하며 끈적하게 묻어나는 질식의 그림자를

세상 밖으로 꺼내려는 순간, 됐어요

옷과 몇 개의 환기되지 않는 호흡을 주섬 걸치고 나오는 오후

촬영을 끝낸 남자의 금속성이 짧게 뒤따른다

이제 숨을 쉬어도 됩니다

 

등나무 / 박경원

 

지난날들은 모두 다 단절되었다

슬리퍼로 다가와 연기 몇 모금 띄워 보내던 담배도

더는 찾아들지 않는다

겨울 한때

세상의 기억들은 등나무 밑에 이르러 비밀의 뼈를 추리기 시작한다

좁은 어깨를 파고들던 여름밤의 속닥거림이

새벽 가까이 불면에 매달려 있던 베란다 끝 그림자와

초면의 기척만 나누곤 자리를 내주고

등나무,

사내가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은 덜 꺼진 고민을 물고서

겨울 쪽으로 한 번 더 뒤틀렸으리라

 

지금 나는 한겨울 등나무 밑을 서성이고 있다

창틀은 굳어버린 지 오래고 이야기들은 빠른 속도로

모습을 감춘다

그 밑을 한여름 연기처럼 덜 지워진 내가 어른거린다

 

 

/ 박경원

 

숲이 나무들의 흰 살을 들쓰고서 하늘로 오른다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메아리, 새의 지저귐이 나무들의 운명에 순응하며 뒤를 따른다

살점 발라진 뼈들을 묻고서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오르는 것 중엔

그리하여 편히 걸터앉아야 할 휴식의 옆모습이 있다

못을 맞물고서 직각의 무게를 담아낼 의자의 삐걱거림과 내색을 숨긴 무표정한 대화가 있다

침묵에 짓눌려 창 밖 구름을 넘겨다보던 숲 저쪽 오후의

도시가 있다

 

나무 사이 뒤뚱거리던 바람을 물고서 푸른 골짜기를 하얗게 빠져나가고 있다

숲 한 줌 건져내기 위해

몇 개의 골짜기 봉우리를 텅 비우고 허공 저쪽 움푹한 하늘을 골라 빠르게 떠내려간다

그 아랜 방금 배달된 삼겹살을 지불하는 숯 굽는 집 사내의 홀쭉한 시장기도 까맣게 들비친다

 

 

사수자리 1 / 박경원

 

9월이 오기 전

나는 서쪽 구름들을 향해 거인 같은 눈을 가져야 한다

뚜벅뚜벅 걸어가 초저녁 술집의 창을 익혀야 하고

출입문 위치와 수선이 필요한 의자

누군가가 새겨놓은 탁자 위 낯선 부호들을 살펴야 한다

긴 손톱을 가진 남도 말씨와 마주앉아

야심해지수록 짙어지는 북쪽 도시에서의 사랑을 들어야 한다

문 닫는 시간과 주인의 귀갓길을 익혀야 하고

문득 멀어지고 만 집의 방향을 향해 돌아오는 길에 부를

노래 몇도 준비해 둬야 한다

낮은 기압골에서 잠기지 않을

가로등 골목의 불빛 모서리도 한 둘 쯤은 닦아놓아야 할

8월 둘째 주 금요일, 나는

누군가에게 발신될 서쪽 하늘을 물색하며

사수자리가 잘 전망될 9월 입구, 저녁거리로 나선다

 

*9월 초순에 잘 보임. 궁수자리(사수자리)는 여름부터 초가을 사이에 남쪽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별자리다. 황도12성좌의 제9자리에 해당한다. 궁수자리는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족(켄타우로스자리)의 현자인 케이론이라고 한다. 케이론은 크로노스 신의 피를 이어받고, 불사의 신체와 탁월한 두뇌,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또한 켄타우로스족답게 활도 아주 잘 쐈다. 성도에서는 케이론이 서쪽 하늘을 향해 활시위를 한껏 당긴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것은 제우스의 명령으로 옆에 위치한 전갈자리가 난폭해지지 않도록, 전갈의 심장인 빨갛게 빛나는 1등성 안타레스를 조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망초꽃 저쪽 / 박경원

 

벽안의 세월이 오래도록 머물고 있다

낯선 주파수 속 알아들을 수 없는 볼륨을 높이며

휴전의 한켠을 오래도록 박제시킨다

얇게 포장된 말초의 입구로 한 무리의 반도 사연들이

빨아들여지고

방금 주민등록증을 넘어온 호기심들 몇 미국문화의

찌꺼기를

즐기고 있는 곳, 기지촌

 

자국들이란 깊거나 얕다

망초꽃을 빠져나온 흰 사연들이 팔월 저쪽으로 금기의 소문을 물고 가는 칠월 한때

슬픔의 자국을 따라가다 문득 소스라치는 깊이엔 촛불로 얼룩진 침묵의 기도가 있다

금속질의 무게와 어느 하루의 소녀

훈련들이란 그렇게 가벼운 부주의로 반도의 모퉁이들을 통과하는 것이다

들꽃이 되려면 나이들과 반도의 오후를 무자비하게 밟고서

기지촌 낡은 간판의 환락 속으로 육중한 퇴근을 하는 것이다

또 한 무리의 혼혈아들이 반쪽의 언어로 쏟아질 것이고

자국들이란 기지촌에서 희거나 검다

골목 한켠, 생일 케익과 양초를 든 소녀의 웃음도

블랙 앤 화이트다

 

 

해묵음에 대하여 / 박경원

 

원래의 길이 지워진 녹슨 나사를 풀다가

나는 보았다. 녹이 벗겨지고 잇몸만 남은 수나사에 비해

아직은 생생히 남아 있는 암나사의 해묵은 틈,

이가 주저앉은 자리마다 세월의 꽃이 피어 원래의

청춘을 버리고 그리움의 뒤안길로 견뎌온 우리들의

녹슨 골목길도 함께 보인다.

빠진 못자리처럼 녹슬고 지친 눈빛을 닦으며 돌아오는 길

나무 아래 작은 벌레들의 울음에도 헐거운 발길을

곧추세우는, 평생 샛길 한번 내지 못한

골목과 골목 사이 우리들의 작은 풍경.

문패가 바뀌고 늦은 귀가의 흐느적한 노랫소리 지워졌어도

그쯤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텅 빈 정적을 흔들어 깨우는

습관의 해묵은 자리는 깊은 밤 떠난 사람 아닌

우리들의 몫이다.

밤새 서성이던 골목도 잠들어 이제는 눈 좀 붙여야지, 하며

혼자만의 일상에 머리를 낮추는 짧고 나른한 잠의

담장 너머한 폭 수채화처럼 걸리는 아침 햇살.

긴 잠에서 풀려나는 심장의 박동과 눈곱에 매달린

하루의 무게를 다스리기 위해 몇몇은 수돗가로 혹은

십분만 더, 하며 쥐죽은 듯 물러나는 해묵은 틈, 닦고 털어내도

녹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