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에서 신춘문예 당선자가 배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부러움에 앞서 무척이나 반가웠고 당선자인 시인을 꼭 만나보고 싶었다.
마른 풀섶을 헤치고 연록의 생명이 꿈틀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봄날,
정영희시인과의 만남은 내겐 큰 의미를 두고싶은 날이다.
약속한 장소에는 목련꽃 봉오리가 봉긋봉긋 부풀기 시작했고, 새들은 떼지어 날며 즐겁게 지저귀고 있다.
꼭 뵙고싶었던 소망 때문이었을까?
도로공사로 인해 차가 막혀 늦는다는 시인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설레기 시작했다.
약속시간보다 1시간가량 늦게 도착한 시인은 미안해서 살짝 상기된 모습이 소녀처럼 순수했다.
세련되고 화려할거라고 상상하던 기대감을 속물로 만들만큼 그녀의 첫인상은 시처럼 깔끔하고 단아했다.
우선 2010년 동양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끈'이 탄생하게 된 과정과 계기를 설명해 달라고하자,
차분하게 들려주는 시인의 진솔함이 그 시세계와 삶을 투영해 주는 듯 했다.
나는 어느새 그들의 제사를 들여다 보며 쇠죽도 쒀보고 제사 음식을 장만하며 그들과 일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자아와 세계에 대한 딜레마를 견디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무언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노래 같기도 하고 울음 같기도 한 그것이
시라는 형식을 통해 안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시란 개인의 노래이면서 전체의 노래여야 하고
주변과 세계에 대한 끝없는 눈뜸이어야 한다는 화두가 오래도록 저를 두드렸습니다.
그 새로운 시선이 저라는 존재와 그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과 상황,
어머니와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아들의 아들...
서걱거리는 대숲소리와 댓잎을 스치는 눈송이에 가 닿았습니다.
나는 한 송이의 제비꽃이다가 날아오르는 빈 라면봉지였다가 박스를 줍고 있는 등 굽은 낮달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존재가 제 존재의 근원에 가 닿아 있는 뜨신 끈이었으며
저라는 보이지 않는 끈을 시작으로 세계는 끝도 없이 연결된 거대한 동심원이라는 생각이
"끈"이라는 시를 쓰게 했습니다."
문: 반갑습니다. 그리고 신춘문예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답: 고맙습니다.
문: 시인님은 좋은 글은 어떤 글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답: 치열한 자기비판을 통하여 언어의 한계에 도전하는 글은 언제나 감동적입니다.
그런 글은 끊임없는 자기 모색을 꿈꾸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입니다.
자기 반성적인 언어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과 주변에 대해 정직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문: 시를 쓰기 위해 특별히 하시는 일이 있다면?
답: 시를 쓰기 위해서 특별히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저 고통 자체에 매달리기 보다는 고통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존재성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집중 했고 매 순간 삶과
주변에 대해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문: 시상은 주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통해 얻게 되는지요?
답: 사물을 해석하거나 개인의 정서를 대상에 투영하는 방식이 아닌 관찰을 통해 존재감을 언어화 하고자 합니다.
문: 창작시간은 주로 언제가 좋으신지요?
답 : 길을 걷다가 혹은 책을 읽다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직관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문: 시를 쓰는데 영향을 주거나 존경하는 시인이 있다면 누군지요?
답: 한 때는 보들레르에 심취해서 시집을 통 째로 필사한 적도 있었지만
국내 시인 중에서는 김수영 시인을 좋아합니다.
시는 머리나 심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던
시인은 개인의 실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의 불합리에 대해서도
창작행위를 통해 끝까지 정직성과 성실성을 유지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문: 문학적 동지들이 있다면 그들과의 소통은 어떻게 하고 있으신지요?
답: 서로의 작품을 놓고 치열하게 비평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끊임 없는 창작 행위를 통해 정신적인 높이를 공감하려고 합니다.
문: 끝으로 선생님 좌우명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답: “깨어 있다는 것은 소통하는 것이다.
언어의 소통은 자연과의 소통이며 신과의 소통이다”라는 것입니다.
주변경관과 잘 어우러지는 시인과의 정담은 편안하고 정겨웠다.
우린 시를 떠나서 같은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아쉽게 헤어졌다.
아래 글은 정영희 시인이 보내온 요즘 근황이다.
- 근황 -
광주터미널과 서울정형외과 사이를 지나간다.
도시는 며칠 전과 다름없이
크략숀을 울리며 차량들이 빠르게 달려가고 사람들은 종종걸음을 친다.
경안천변의 가로수와 돌들도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은 풍경들이
어느 날 문득 낯선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 때가 있다.
가령, 내 몸을 빠져나가고 있는 나를 목격했을 때처럼 비현실적인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어버린 듯 무중력의 상황 속에
내가 붕 떠오르고 있다는 느낌을 경험할 때가 있는데
나는 그런 상황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사라져가는 그 찰나를 잡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안타까움과 안간힘이 나에게 시를 쓰도록 강요했다.
오후 7시, 퇴근시간에 밀려든 차량들의 행렬로 도시는 꼼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생이 네모난 바퀴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툴툴거리고는 했다.
모든 것들이 하나의 우연 속으로 흘러들 때
감각이나 지각 너머에서 오는 거부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에 나는 모든 것을 집중한다.
언젠가 신께서 내 앞에 한 부대의 퍼즐조각들을 풀어 놓았고
생은 그것을 하나하나 맞추어가는 과정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퍼즐조각들이 모여 조금 씩 제 형태를 드러내자
비로소 나는 하나의 조각이면서 또 전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일테면 바다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과
한 방울의 바다에 대한 생각,
그 생각이 오랫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을 때
마침내 차량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버스는 다시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시간들도 사실은 그렇게 순간의 속도 속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엷어진 공기가 냉이꽃 속으로 가만히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다.
지금 내 안으로 밖으로 예감처럼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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