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김영미
가을이 되어
은행나무 길을 걷는 것은
먼 길 달려온 햇살의 발가락이
눈부시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의 일식으로 그 향기
땅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며
바람의 페이지가 없이도
이 길이 끝나기 전 릴케는
한 권의 가을을 완성할 것이다
가을이 비워지기 전 서둘러
지상의 어지러운 잠을
화석으로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여름을 등지고
가을로 쫓긴 그해에도
증발하고 말 땀의 증거들은
오후의 체온을 비집는 공복 속에
몇 잎의 가난으로도 빛을 발하던
눈부신 사연
씨알을 품은 태양의 길은 이어져
걸음을 뗄 때마다 잠행하던
내 안의 캔버스는
몇 번의 붓칠만으로도
아우성치는 실핏줄들이 떨켜에 가닿는다
[시작메모]
- 별이 된 선생님을 생각하며
곰실거리는 햇살들의 소환장을 받고서 은행나무 길을 걸었습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릴케의 시어들이 잠행하듯 펼치는 풍경들은 눈길 닿는 곳마다 탄성을 터트리게 합니다.
추억은 아픔조차 향기롭게 하는 마성을 지녔나 봅니다.
며칠 전 17여 년을 함께 활동하던 선생님이 소천을 하셨습니다.
세상엔 슬픔의 영토를 헤아리다가 좌초한 추억의 계절이 많기도 하지만,
좋은 기억으로 저장하며 그 분도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나뭇잎이 떨어져 새움을 틀 뿌리를 덮어주고 가듯,
우리는 돌아올 계절의 연둣빛을 충전하며 내일로 갑니다.
나뭇잎들이 꽃이 되어 빛나던 가을도 떨켜를 품으며 겨울에게 길을 열어 주듯이....
▼ 골프타임즈 가는 길
골프타임즈 모바일 사이트,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40회]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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