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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의 사생활/ 장요원

언어의 조각사 2015. 3. 5. 13:24

허공의 사생활

 

                                       장요원

 

 

나무들이 손가락 모양으로 길어지고 간략해졌다

손톱이 빠져나간 자리처럼 그늘이 벌겋다

공중이 핼쑥해졌다

 

단단해진 공중을 뜯고 나온 꽃망울을

따라나온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은

장미의 기분이 아니야

 

문득 구름같은 게르를 몰고 다니는 풍경을 상상했다

구름을 탕진하는 일은 바람이 관여한다 해도

그것은 허공의 권리

 

구름의 성분이란 죽은 새의 울음과 기억이 빠져나간 그을음

그리고 물컹거리는 무릎들

빗방울에서 저녁 냄새가 나는 이유이기도 하지

어제를 잊어버리기 위해 눈송이들은 하얗게 태어나네

 

모자를 눌러쓴 사람들이 골목으로 모여들어

웅성거리다가

하얘지다가

눈과 입술을 두고 사라졌다

왈자지껄한 목소리들이 눈사람 속으로 들어가 부풀었다

 

장미의 몽우리가 점점 진해지자

어둠이 허공을 닫는다

담장이 그리운 장미가 공중의 허벅지를 끌어 당긴다

 

 

 풍선들 (외 4편) / 장요원

 

 

  빵빵하던 이팝나무들이

  끈만 남겨진 채

  푹,

  꺼져 있다

 

  쭈글쭈글한 바람이 펴지려고 나무의 그늘이 가렵다

 

  숨을 뒤척이는 바람의 발아,

 

  여름은 온통  코를  땅에 박고 숨을 불어댔지

  바람이 쑥 쑥 자라났고

  우리의 폐는 그늘처럼 커졌어

 

  가끔, 커다란 허파를 가진 바람이 공중으로 날려 보내려고 안달이 났지만 

  끝내 

  주둥이를 놓지 않았지

 

  우리가 마주보고 스틱을 휘휘 저을 때면

  카푸치노처럼 점점 부풀어 올랐지

  푹 푹 꺼졌지

  가을은 어지러움증을 앓았고

  허공의 손톱은 

  자꾸만 까칠해졌지

  

  어둠이 불어놓은 태양이

  빈 끈에 매달려 있는 아침,


  주저앉은 둥그런 그늘이 일어서고 있다

 

 

 

 

 고여 있는 잠  / 장요원

 

  꽃잎이 딛는 자리마다 꽃의 족적이다 울음에 갇힌 족적들이 가라앉지 못하

고 고요 속에 떠 있다

 

 밤새 흔들린 나무들이

 뜬 눈으로 졸고

 뒤늦게 당도한 밀봉된 울음들이 툭툭 뜯겨진다

 

 검은 리본을 두른 영정에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다

 

 목백일홍의 기침소리가 고였다 가고

 가을비의 헐어진 귀 한 쪽이 

 찡그린 바람의 이마가 고였다 간다

 나무들마다 

 붉거나 아릿하거나 혹은 시큼한 계절이 고였다 갔을 것이다

 

 밤새 고여 있어도 부패되지 않을 울음으로 전이된다

 울음은 어둠을 구부리고

 둥둥 떠 있는 눈꺼풀은 동공의 각을 늘린다

 

 한 女子가 고였다 간다

 

 몸속에 독毒이 다시는 고이지 않도록 꽁꽁 묶여 

 산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기억이 풀어지는 시간 / 장요원

 

 

 세탁기 안에서 휴대폰 신호음이 울린다 재킷 호주머니에서 멈추었던

 기억이 풀리고 있다 물을 잔뜩 먹은 신호음이 울린다 다급한 목소리들

 을 둥근 물살이 신나게 돌리고 있다

 

  물줄기가 체위를 바꿔가며 소리를 먹는다

 

  사.랑.한.다가  퉁퉁 불어 § Å ¿ ㎕ ‰ ¿로 떠다닌다

 

  소리들을 잔뜩 먹고 거품들이 부푼다

  기억이 터져 사라지면 새로 익사할 문자가 부풀어오른다

 

  창 밖 하늘이 낮게 내려온다 

  거품처럼 구름들이 부푼다

  문득 

  저 구름 속으로 들고 싶은, 소리의 기억을 건져내기 전 

  신나게 돌고 싶다

  탈수된 구름들이 콸콸콸 쏟아질 것이다

    

  음각音覺을 잃은 소리의 혀들

  소리들이 저를 벗어버린 껍질들

 

  몸들이 다 빠져나간 시간,

 

 

 

 

 

 허공 한 켤레  / 장요원

 

 

 

 신문지 몇 장이 돌돌 말고 있는 절름발이 잠에

 두 발이 나와 있다

 걸음이 빠져나간 무릎이 조용히 접혀 있다

 

 오래된 타일처럼 금이 간 발바닥을 발등이 둥글게 감싸고 있지만

 바깥은 잠을 안으로 들여놓지 못한다 

 

 길이가 다른 두 발 사이에는

 기울어진 계단이 접혀져 있다

 오르고 내릴 때마다 접혀졌다 펴졌을 계단,

 절름발이 계단에는

 횡단보도를 끌던 얼룩말이 뛰고

 음계 없는 크락숀 소리가 가쁜 숨을 누르고 있을 것이다

 

 걸음 안에는 허공이 들어 있다

 

 뒤집혀 있는 저 걸음에는

 절뚝거리던 길들이 끌고 다녔을 몇 켤레 구름들이 접혀 있을까

 어쩌면 걸음은

 허공을 신고 다니는 일이 전부인지도 모른다

 

 온종일 끌다  벗어버린 그믐달의 뒤축이 부어 오른다

 

 아코디언처럼 접히고 휘어진 길이 늘어났다가 줄어들 때마다 

 허파가 새어나오는 걸음이

 밤새 자라고 있다

 

 

 

 

 

 

 숲 / 장요원

 

 


  헐거워진 벽에 매달린 뻐꾸기 둥지에는 알이 없다

  울음이 열릴 때마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시간들만 튀어나온다

  고개를 내밀고 우는 저 환지통

  목청이 터질 때마다

  늙은 시간들이 사라진다

 

  부화되지 않은 시간을 떠서 세안을 하고 뻐꾸기가 내어놓은

숲길을 걷는다

  발자국 뗀 자리마다 소리가 고여 맑아지는 水位가 있다

  지하철 개찰구를 지날 때도 꾹, 백화점 바코드에도 꾹,

  소리를 다 소비하고 돌아와 다시

  충전하는 몸들

  

  울음이 부리를 침대에 묻는 시간,

  현관 신발엔 하루치의 울음이 단단히 묶일 것이고

  어둠은 캄캄한 잠을 품고 있다

 

  이미 떠나간 시간들, 낯설지 않은 울음의 횟수가 집안을

울린다 

  시간이 날아다니고

  부화되고 있는 숲이 뒤척이고 있다

 

 

ㅡ「애지」 2012, 봄호 (애지의 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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