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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올해의 좋은 시' 김효선외

언어의 조각사 2015. 2. 7. 11:43

콩국이 끓는 시간 / 김효선

 

가장 추운 날 콩국을 끓인다.

연애의 마지막처럼 비릿하고 은밀한 빛깔,

적당한 온도란 얼마나 하염없는 기다림인가.

어디로 가야 우연이 운명을 만나게 되는지

알 수 없다, 오래 끓을수록 자주 놓치는

절망을 끌어안을 때 사랑의 부피는 정해진다.

채로 썬 무와 콩을 갈아 넣는 것이 전부.

단순해지기 위해 나는 너에게 몸을 허락했고,

점점 비릿한 것들이 섞이고 섞여

단단했던 기억들이 지워졌다.

콩국은 누구나 끓일 수 있지만 아무나

끓일 수 없는 것.

순식간에 흘러넘치고, 흘러넘치는 것만으로도

바닥은 순식간에 얼룩을 기억한다.

뚜껑을 열어도 끓어 넘쳐, 그것은 가끔

아직 오지 않은 이별을 예감하기도 한다.

 

겨울이면

비릿한 네가 내 안에서 끓고 있다.

 

 

 

매화나무 그늘 /김효선

.

봄밤의 수음은

연두를 밀어 올리기도 전에

서둘러 분홍을 피웠다.

달빛이 차가울수록 몸은 뜨거워지고,

향기는 깊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눈을 떴을 때,

그 지독함이 오히려 사랑을 가두고

환청으로도 꽃은 피었다 지고.

표정 없는 꽃들은 복병처럼

자꾸 달빛을 키웠다.

 

 

봄밤은

주어도 함부로 바꾸는 달빛. 자주

앓았고, 열흘이나 일찍 생리가 터졌고,

이미 나에게 등 돌린 향기는

다른 곳에서 분홍분홍 웃고 있었다.

영혼까지 핼쑥해진 나무는

이제 표정 잃은 달빛 속으로 사라졌다.

사랑을 믿지 않아서

더 빨리 무너졌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기억은 방향을 잃었다.

 

그리고,

그늘이 되었다 달빛도 없이.

 

 

 

넉넉한 밥상 / 맹문재

 

고대병원 응급실 옆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오천 원짜리 된장찌개를 주문해 먹다가

아버지의 지갑을 열어본다

천원짜리가 여남은 장

아버지는 지갑에 웬 돈을 그리 넣었는지

십만 원을 꺼내 어머니의 용돈으로 드리고

시골 병원에서 타고온 구급차 비용으로 이십육만 원을 내고도

남은 것이다

큰아들에게 따뜻한 밥을 사주려고

준비한 것일까

남은 돈을 세어보니 열한 장

하늘길 가실 여비를 챙겨놓고도

식사비로 충분하다

아버지가 차려주신 넉넉한 밥상

빈 그릇까지 맛있다

 

 

 

 

노자의 무덤을 가다 / 이영춘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보았다

한 줌 바람으로 날아가는 사람을 만났다

지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상은 빈 그릇이었다

사람이 숨 쉬다 돌아간 발자국의 크기

바람이 숨 쉬다 돌아간 허공의 크기

뻥 뚫린 그릇이다, 공空의 그릇.

살아 있는 동안 깃발처럼 빛나려고

저토록 펄럭이는 몸부림들,

그 누구의 그림자일까?

누구의 푸른 등걸일까?

온 지상은 문을 닫고

온 지상은 숨을 멈추고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그릇,

빈 그릇 하나 둥둥 떠 있다

 

 

 

 

내가 사람이 아니었을 때 / 조용미

명왕성 너머에 있는 먼 곳, 거기서부터 오르트구름이다

그곳까지 햇빛은 어떻게 도달하는가

한낮의 햇빛이 눈이 부시지 않은 기이한 곳 해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을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목성의 바다가 아니다

명왕성에서도 몇 광년을 더 가야하는 우주의 멀고 먼 공간, 아무도 가보지 못한 태양계의 가장자리. 내가 사람이 아니었을 때

난 거기서부터 고독을 습득한 것이 틀림없다

먼지와 얼음의 띠에서 최초의 무언가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오르트구름으로부터 여기로 내가 오고 있다

그 둥근 고리에서부터 무언가 생겨났을 테니

명왕성까지 도달하려면 아직 조금 남았다

어서 천천히 가자 그 다음은 사막이 있는 프른 별 지구로 가는 일만 남았다 내가 사람이 되었을 때

 

남해 /허연

 

 

여자는 바다를 밀었다. 여자가 바다를 밀어낸 만큼 여자의 생은

앞으로 나아갔다. 여자는 말없이 바다를 밀었다. 여자에게 밀린

바다는 잔물결로 뒤로 밀려나고, 여자는 무심히 그다음으로 밀려오

는 바다를 밀었다.

잔물결에 그려진 생. 여자는 바다만을 밀고 있는게 아니었다.

여자는 바다에 비친 생을 밀고 있었다. 간혹 물살이 뱃전에 부딧

히는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이 의식은 고요했다.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저 섬들의 세밀화. 난대림의 북방한계

선에서 날아다니는 배고픈 새들. 여자가 바다를 밀어낼 때마다

힌 새들은 발레리나처럼 난대림 위로 살짝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앉고는 했다.

여자가 미는 바다 여자에게 밀리는 바다.

조용한 의식 속에 델타의 하루가 저물었다. 여자는 내일 또 다른

생을 밀어낼 것이다.

 

 

의미하지 않는 것 / 여성민

 

 

비가 오면 감미로운 생각을 하게 되잖아 구리와 니켈

양은은 은색이다

라고 말하면 왠지 쓸쓸해지거나 카펫 한 쪽이 젖는 것 같아 양은은 은백색이고
색을 결정하는 것은 아연이니까 함석을

쥐어보면 알지 염소가 왜 관능적인지 카펫 위에는 염소가 있고
카펫 아래엔 염소보다 육체적인 것이 알루미늄 호일이

에어플레인은 카펫 안에서 사라지지

다시 말해 봐요 염소가 뭔지

그것은 금속처럼

얼굴에서 두 손을 파내고 하나의 그릇처럼
은은 은의 기분을 만든다 그것은 의미하는 것 아연은 살보다 육체적이고

비가 오면 알루미늄과

함몰하는 에어플레인 에어플레인 따뜻하고 요구르트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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