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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권력앞에 흔들린다면...(모윤숙)

언어의 조각사 2010. 10. 22. 21:21

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야합이 낳은 ‘반쪽 건국’ / 정경모

등록 : 2009.06.14 18:27 수정 : 2009.06.14 23:31

1948년 3월 12일 유엔 조선임시위원단 메논 단장이 ‘남한 단독선거안’을 지지하도록 로비한 시인 모윤숙은 그해 12월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파리에서 열린 이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자 한국대표단 8명이 기쁜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왼쪽부터 모윤숙 시인, 조병옥·장면 박사,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 등이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30

‘태곳적부터 통일된 하나의 국가였던 조선을 둘로 가르는 단독선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공언해 오던 사람이 메논 단장 아니오이까. 그런데 1948년 3월 12일 유엔한국위원단 표결에서 그는 찬성표를 던져 결국 4 대 2의 다수결로 단독선거안이 통과됐소이다.

메논의 돌연한 변심에는 시인 모윤숙의 미인계가 주효했던 까닭인데, 이에 대해서는 모윤숙 자신의 증언을 들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오이다. “만일 나와 메논 단장과의 우정 관계가 없었더라면 단독선거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계셨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신동아> 1983년 2월호)

메논 자신은 또 뭐라고 하고 있나. “외교관으로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이성(reason)이 심정(heart)에 의해 흔들렸다는 것은 내가 유엔조선임시위원단 단장으로 있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나의 심정을 흔들었던 여성은 한국의 유명한 여류시인 매리언 모(모윤숙)였다.”(<메논 자서전> 1974년 런던)

사소한 우연이 어떻게 한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 있는가에 대해, 메논과 모윤숙의 치정 관계는 매우 적절한 일례를 남겨주었노라고, 호주국립대학 매코맥 교수는 말하고 있소이다.(<씨알의 힘> 제9호 1987년 10월)

3월 12일의 표결로 남한 단독선거의 실시가 결정되자 김구 선생께서는 ‘유엔이라는 기구가 우리 자손만대에게 씻을 수 없는 원한을 남겼다’는 한탄의 말을 남기고 38선을 넘어 방북길에 오르신 것인데, 그에 앞서 제주도에서는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민란이 일어나 25만 도민 가운데 8만이 목숨을 잃은 4·3항쟁의 참극이 벌어지지 않았소이까.

그래도 5월 10일 단독선거로 이 박사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고, 평양을 다녀오신 김구 선생은 건국 이듬해인 49년 6월 26일 암살당하신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날로부터 꼭 365일 만인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게 되는 것이오이다.

한 가지 여기서 일러둘 것은, ‘단독선거로 수립된 남한 정부는 제2회 유엔총회 결의문(112-Ⅱ)이 요구하는 국민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며 호주 정부가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선포식에 대표단의 파견을 거부했다는 사실이외다.

이제 내 얘기로 돌아가서, 지요코와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그러니까 51년 가을이었을까. 경기중학 동기동창인 백남석군이 찾아왔습디다. 그는 주일대표부에서 유태하 공사 비서인가로 일을 하고 있다면서 경무대로부터 연락이 와서 찾아왔노라고 합디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잔뜩 긴장할 수밖에요. ‘정경모가 지금 미군 사령부에서 뭘 하면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라’는 그 지시는, 묻지 않아도 본국으로 돌아와 경무대에서 일을 보라는 말이 아니겠소이까.


나는 솔직하게 내 처신을 전했소이다. 이만저만한 사유로 일본 여성과 결혼을 했노라고 말이외다. 그 뒤 얼마 안 있어서 백군이 다시 찾아왔습디다. 안건이 너무 미묘해서 공식 통로로 보고하기도 뭐해서 직접 자기가 경무대로 가서 이 대통령께 보고를 올렸는데, 대통령께서는 노발대발하시면서 화를 내시더라고요. 그걸로 이 대통령과의 인연은 끊어진 것이지요.

그래도 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나 자신이 각오하고 있었던 것은, 이 대통령께는 참으로 죄송스러운 일이나, 나는 나대로 그분에게 느끼는 실망감이 없지 않았다는 점도 여기서 실토해 두어야겠지요.

충청남도 대전 근처에 낭월리(현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라는 곳이 있을 것이외다. 한국전쟁 초기에 그 마을에서 빨갱이로 몰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더기로 참살 당한 사건이 있었다는-지금 생각하면 그 사건은 전국적으로 좌익이라고 지목된 30만명의 무고한 농민들이 학살당한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기사였는데-이 소름끼치는 참혹한 사건의 기사가 영국 노동당 기관지 <데일리 워커>의 위닝턴 기자에 의해 자세하게 보도된 일이 있었소이다.


정경모 통일운동가
그러자 경상남도에서 일어난 거창양민학살 사건에 대해서도 잇따라 여러 영어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하였소이다. 국군 제11사단이 거창마을 200명 가까운 촌민들을 국민학교 마당에서 기관총 사격으로 총살하고 시체를 불더미에서 태웠는데 아직 살아서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어린애를 군인들이 구둣발질로 불길 속으로 처넣었다느니 등등, 어떻게 이 대통령 치하의 한국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해방자’라며 나 자신 그렇게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미군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나? 평화였나, 해방이었나. 몸담고 있는 기구가 미군 사령부였느니만치 마음속의 고민은 더 심각한 것이었소이다. 재일 정경모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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