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뜰을 잡아당기다
김영미
갈 볕 고운 화창한 주말이다.
친구와 함께 오른 설봉산은 싱그럽고 아름다운 품을 열어 반갑게 맞아줬다.
산에서는 오고 가는 질서의 길목에서의 모든 일은 겸허하다.
마을 밖 나지막한 언덕을 넘어온 풀벌레들의 관절이 좀 더 튼실해질 듯하다.
‘설봉산(394m)은 부의 서쪽 5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이다’라는 동국여지승람에 기록이 있다.
또한, 무학 부학 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산 정상에서 굽어볼 때 학이 나래를 펼친 모습과 흡사하여 유래되었다고 추정된다.
설봉산은 험준하지 않은 산세가 운치 있어서 산행이 초보인 나도 오르기 좋은 산이다.
약수터가 8개소나 있으며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위해 작전을 세웠다는
‘설봉산성’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영월암’(향토유적 14) 등의 유적이 곳곳에 있다.
잘 조성된 등산로에는 시비를 설치해 놓아서 심신을 단련하며 쉼표와 함께 힐링할 수 있어서 참 좋은 곳이다.
산을 내려와 도자공원을 거쳐 시내로 들어서니 마침 오일장이어서 먹거리 볼거리로 풍성했다.
이천 ‘관고 전통시장’에서 어묵도 먹어보고 닭발과 순대를 안주 삼아 약간의 막걸리를 마셨더니 가을 하늘 위 구름이 된 기분이다.
우린 여대생처럼 깔깔대며 시장을 활보하다가 추억의 사과, '홍옥'을 만났다.
햇빛을 반사하며 유난히 붉은 사과들이 세콤 달곰한 좌판을 펼쳐놓고 손뼉을 치며 나를 유혹한다.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던 어린 시절,
엄마는 함지박에 사과를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온 보부상에게 사과를 사시곤 했다.
아버지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어린 자식의 눈망울을 차마 외면할 수 없던 엄마는 “아버지 오시면 먹으려 했는데…….” 하시며 사과를 깎아주셨다.
엄마가 사과껍질을 벗기는 동안에 우리 자매들을 그 사과껍질을 경쟁적으로 가로채 먹으며 깔깔대곤 했다.
그런데 엄마는 꼭 두 쪽으로 나눈 반 개만 주시는 것이었다.
반쪽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난 남겨진 사과 몇 알을 바라보다가
아버지가 퇴근하자마자 허기진 목소리로 엄마는 꼭 사과를 반쪽만 준다고 아버지께 일러바쳤다.
그리고는 사과를 한 개씩 먹었으면 좋겠다고 철없이 내뱉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반쪽씩 먹었던 자매가 네 명이니까
새콤달콤한 사과 향만 맡아야 했던 엄마의 몫은 없었던 거다.
하지만 나의 철없는 말 한마디에 자식 사랑이 남달랐던 아버지는 사과나무 25그루를 심으셨는데 그 사과의 품종이 홍옥이다..
부모님께서는 사과를 수확하면 동네 친지들께 한 바게트씩 나눠주시곤
응달진 뒤란 움막에 왕겨와 함께 묻어두고 겨우내 우리 자매와 뒤이어 태어난 남동생과 함께 사과를 맘껏 먹을 수 있게 해주셨다.
주변 사람들이 사과를 팔라고 하면 그들이 먹을 만큼만 내어 주시곤 우리 육 남매를 위해 결코 파는 일이 없었다.
과일뿐 아니라 땅콩이나 밤 대추 감 자두 포도 등등
모든 과일과 곡식들은 우리 육 남매를 위한 것이었다.
닭을 키우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나는 사과를 무척 좋아한다.
암 투병 중인 엄마에게 "엄마,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사 갈게요"하고 전화를 하면
"먹고 싶은 거 없으니 그냥 와"하시며
집에 먹을 것이 너무 많으니, 아무것도 사오지 말라시며 가벼운 내 지갑 사정만을 염려하신다.
지난 시절의 부모님에겐 하늘이 내린 천형 같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이렇게 아름다운 설봉산 산행과 같은 유희를 뒤로하고 오로지 자식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사셨다.
자신은 삶의 명분과 철학까지도 켜켜이 가슴 깊이 숨기고서
험난한 삶의 굴곡을 악산의 산정을 등반하듯 넘어오신 분들이다.
고단했을 부모님의 그 아름다운 손을 잡아보고 싶다.
칠순을 맞이한 할머니를 위한 손주들의 재롱을 흐뭇해하는 엄마를 보며 무심결에
"엄마, 엄마는 과일 중 뭐가 제일 좋아?"하고 물어보았는데,
"난 사과가 제일 좋아" 하신다.
서산에 걸린 노을이 홍옥 빛깔처럼 붉다.
갈 볕이 시들기 전에 잘 익은 사과를 푸짐하게 사 들고 엄마를 만나러 가야겠다.
2019.10.12(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