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지주망 (蜘蛛網)/기혁

언어의 조각사 2015. 5. 18. 10:56

 

 

 
 

지주망 (蜘蛛網)

 

  기 혁

 

 

 

그물을 집으로 바꾸기 위해 나는

독(毒)을 품어야 했다

모든 생활(生活)을 허공에 걸고,

어미의 살점을 먹고 자란 패륜이며

배우자의 목숨을 얻어야만 끝나는 생식(生殖)의

아슬아슬함까지도

나는,

무수한 전조(前兆)들로 이루어진 그물 위에 모두

풀어놓아야 했다

커튼도 창턱도 없는 둘레를 뒤져보면

매일 아침, 건밤*의 사리처럼 맺힌 이슬과

그 이슬에 비춰진 사람들의 얼굴이

그물 위

빠듯한 세간마냥 여겨질 때도 있었다

무심하게 그물을 흔드는 바람은 내게서

숨겨둔 다리를 꺼내어 읽고,

영문도 모른 채 허우적거리던 나비는 더 이상

타인의 방*에서 눈물짓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한낮이면

나는 몇 가닥 적빈(赤貧)을 전신주에 이어,

미세한 전류를 타고 내려오는

불 꺼진 가계(家系)의 내력이라던가,

사람이 사람을 집어삼키는 오랜 사연들을

친족(親族)의 이야기처럼 엿듣는다

제 속에서 뽑아낸 그물을 디디고서,

투명하고 질긴 것들을 눈감아야 하는 슬픔은 매번

주저하는 늦가을의 밀밭보다 서러웠다

나의 생애는 흔들렸을 뿐,

어느 세상에도 죄를 짓진 않았으나

집을 지어 키워낸 독을 품고 웅웅거리는

젖은 속내를 모두 죽여야만 한다

 

 

————

* 건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밤.

* 타인의 방: 최인호의 소설 제목을 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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