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흑발/김이듬
국자에 뻐끔한 쇠옹두리가 걸린다 꽤 곤 뼈에는 터널이 있다
굴다리 아래 애 업은 여자가 뛰고 있었다 포대기에서 두상이 떨어졌다 내게 굴러왔다
무심코 발로 차 강으로 보냈다 거지 여자는 미친년이었고 여전히 뛰고 있었다
아저씨네 앞마당에서 암소가 울었다 더 짧게 교복 치마를 접어 올렸다
뼈를 보내왔다 발신자 얼굴은 모른다 배 잡고 웃었다 앙상한 다리 부풀어 오른 배 위에
뱀 무늬로 터진 피부가 있다 우는 개구리 잡아먹고 싶다 어두워지기 직전에 여름이 있다
체질이 바뀌었다 사랑하는 엔트로피 과다한
바닥과 수평이 되면 두려움이 주는 매력에 사로잡힌다 사색은 예쁜 색
갓난애는 실금 많은 혼혈아 달 무늬보다 수평선보다 멀리 금을 그었다 그 애는 우유 나
는 시리얼 함께 살 수 있었을까 잠재된 푸른 눈은 발아하고 다른 형상은 차차 장대한 망
각으로 가기를
병원비만 내주세요 인터넷 거래는 쉬웠다 최소한의 지문도 찍지 않은 몸 핏기 없는 달
덩이 싸매고 사라지는 젊은 부부 중요한 건 여담 아기바구니까지 차비 들 일 없다
마을의 모든 소가 구덩이를 향해 가고 구름을 보기 전에 폭우가 내리던 날 오오 보드라
운 머릿결은 허벅지 사이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가 다시
목숨을 걸 만큼 재밌는 게 없을까 저건 뭘까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강 너머 흰 원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둥그런 거
─『문학과 사회』2015년 봄호
빛의 파일 /송승언
나는 악보를 쓰고 버렸다. 그리고 버렸다. 버린 악보들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나는 건물을 잘 몰랐다. 건물도 나를 잘 몰랐다. 우리는 계단으로 규칙을 세웠다. 낯선 이로서, 낯선 곳으로서. 아무런 장식 없는 건물. 좀처럼 빛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양식. 시멘트 안으로 목소리가 튕겨 나왔다. 건물이 나를 곡해한다는 증거. 해석되지 않는 건 없었다. 해석을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시멘트가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쓸 수 있었다. 썼다. 쓰고 버렸다. 그리고 버렸다. 건물은 몇 장의 악보가 되었다 헐렸다. 건물은 불안 증세를 보였다. 건물은 흔들렸지만 나는 어쩐지 꼿꼿했다. 혹시 나는 건물 바깥에 있는 걸까? 건물을 벗어난 채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 있는 건 아닐까? 고개를 들자 쏟아졌다. 버린 악보들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빛이 쏟아지는 소리. 시끄럽다. 옥상이다. 아니. 지하 창고다.
다정
배용제
나는 수많은 것들의 증오에 대해 증명하고 싶다
바람난 사내의 피부가 반질반질 빛나는 월요일 저녁
창가에선 몇 개의 화분이 말라죽고 있었다
멀리서 휘파람을 부르며 풋내기 계집애가 오고 있는 월요일 저녁
어느새 치를 떨며 빛나는 가로등 아래로
쏜살같이 지나가버린
수레를 끌고 어떤 사막을 건너온 낙타를 바라보던
거대한 광고판 아름다운 공주의 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희디흰 살결 위에서 헐떡이는 바람
가장 불규칙적인 방법으로 싹이 돋고 꽃들이 피어났다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것 뿐이지
그렇게 나는 너에게 수많은 애무의 효과에 대해 말해주었다
서로를 겨냥할 수 있는 얼마나 많은 증오와 권태의 종류가 있는지
매일 밤마다 깨달았다
세상에 어떤 밤이 고요했던가
또 어떤 어둠이 단 한 번이라도 세상을 내버려두었던가
꽃은 꽃의 방법으로,
바람은 바람의 방법으로,
눈물은 눈물의 방법으로 저마다 미친듯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다만 지금이 봄이라는 계절이고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것뿐이지
그러나 나는 모두 기억하고 싶었다
어두워지면 더욱더 환하게 빛나는 공주의 희디흰 살결과
아무 때나 피어나고 아무 때나 시들어버리는 생물들의 욕정과
수많은 낙타의 결과
가장 은밀한 시간을 가르치는 고양이의 교육철학과
비명을 지르며 피어나던 나의 이상한 고통의 체위까지
다시 월요일에서 월요일까지
저녁이 오길 기대하는 바람난 사내가
어떤 은밀한 방식으로 이상한 꿈을 꾸어도 상관없겠지
떨림
배용제
버드나무에서 새 한마리 날아오르자
나뭇가지가 파르르 떨린다
일순 허공의 거대한 세계가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다
제 몸 깊숙이 떨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나무는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다
어쩌면 버드나무는 평생
사소한 바람 소리에도 아득히 정신을 놓으며
떠나간 새의 안부를 물을 것이다
속울음 같은 떨림을 끌어안고
오래오래 제 속을 비워갈 저 버드나무
자신의 영혼이 펼칠 수 있는 마지막 날개 같은 것이어서
떨림이란 또 다른 너의 얼룩 같은 것이어서
없는 너를 품는 것이 얼마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지
내 가슴속 오래 멈추지 않는 울렁증,
어느 상한 마음이 머물다 떠나간 흔적일까
또다시 허공 속 수만의 길을 향해 안부를 묻는다
바람 한 줌이 들여다보는 빈자리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그림자만 버려져 있다
내 것이 아니 나를 내가 사용하는 것 같은 죄스러움에
길바닥에 우두커니 세워두지만
어느새 어두운 내 속으로 따라와 웅크린 채
버드나무와 나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잎이 지거나 완전히 늙어버릴 때까지
서로의 떨림을 견주어본다
날 수 없는 날개를 품는 것이 어찌보면 너무 막막함이라서
세상의 모든 한 번
배용제
비가 쏟아졌다
꽃들이 마구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처음 어깨를 두드리는 빗방울들은 단 한번 나를 느끼곤 사라졌다
집집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늙은이들은 창밖을 힐끔거렸고 아이들은 장난감을 망가뜨렸다
무감각한 것들에게만 불이 담겨졌다
끝없이 제 색을 짓이기며 꽃이 지고 진 꽃 뒤로 처음의 꽃이 피어났다
나무와 늙은이 들은 한번의 늙음을 오래오래 견디고 있었다
곳곳에서 구조 신호처럼 돋아난 불빛들이 서로의 증오를 확인하며 달아올랐다 갑자기 세상이 밝아지고
한 번이란 결말에 이르자 서로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마음들이 무너졌고
비가 쏟아졌다
세상의 모든 처음과 혹은, 모든 마지막과
모든 한 번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저녁이 되는 오늘
시집 <다정>/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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